27년 전 가난한 미국 유학생 부부였다. 집에서 학비와 생활비 가져다 쓰는 게 맘에 걸려, 2시간씩 운전하며 한인타운에서 알바까지 했던 팍팍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젊음'은 빛났고 '신혼'은 또 어찌나 달콤한지, 그딴 가난은 모두 덮고도 남았다.
식탁은 딱 9불 99센트만큼 기능을 했다. 상판은 얇은 까만 비닐 같은 게 덮여있었고, 찍히면 찍힌 대로 긁히면 긁힌 대로 티가 났다. 상처를 숨길 줄 모르는 놈이었다. 식탁 위에 뭘 올려놔도 자국이 남았고, 열에도 압력에도 한없이 약했다.
알루미늄 다리는 빈약해서 갓 태어난 사슴 새끼 다리 같았다. 태어나자마자 살아보겠다고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일어나, 건들건들 겨우 버티고 서있는. 그 모양새가 안쓰럽고 위태로웠다.
뭐, 이런 식탁을 기대한 건 아니다.
정이 안 갔다. 내 돈과 시간과 마음을 써서 고른 물건이 아니라 그랬다. 귀국하면 신혼살림으로 장만했던 견고한 원목 식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건 임시로 쓰는 것이었으니까.
그 식탁에서 3년 동안 매 끼니 밥을 차려먹고 공부도 했다. 친구도 불러 술도 마시고 얘기도 했다. 지평선이 보일만큼 뻥 뚫린 26층 하늘에 눈이라도 내리면, 우리는 거기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풍경을 봤다.
"사랑과 관심 속에 자란 것들은 티가 난다. 강아지도, 베란다의 화초도, 주인 없는 길고양이도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하면 반짝반짝 빛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된다. 하다못해 생명 없는 물건조차 그렇다. "
-하현 <달의 조각>
아무도 그 식탁을 아끼고 사랑해주지 않았더니, 헤어지는 건 참 쉬웠다. 귀국할 땐 우리보다 더 가난했던 베트남 이웃에게 선심 쓰듯 주고 왔다.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 식탁과 함께 한 시간은 그렇게 가볍지도 그렇게 쉽지도 않은, 오롯이 소중한 내 인생의 3년이었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임시가 너무 많아질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임시가 너무 많아질까 봐. 내 인생도 임시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집도 그렇다. 내 집 마련할 때까지 임시로 2년씩 30년을 살고 있다.
"잠깐 사는 거니까, 내 집도 아닌데 뭐. 나중에 우리 집 사면..."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금이 아닌 언젠가' 행복하게 살 꿈을 꾼다.
그런 변명으로 사는 공간에는 사랑도 관심도 건네주지 않았다.
내 집도 아니고, 임시로 사는 거니까,
추운 집에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난방시설 안 하고.
내 집도 아니고, 임시로 사는 거니까,
도둑이 홀랑 다 뒤져가도 방범창도 안 달고,
내 집도 아니고, 임시로 사는 거니까,
화장실 냄새 코 막고 숨 참으며 고칠 생각 안 하고,
그렇게 잠깐 스쳐가는 곳이니 대충 해놓고 살았다.
임시로 잠깐만 여기서 자는 거야. 임시라니까~~
지나고 보니, 그 시간도 모두 소중한 나의 시간이었다.고쳐 쓰고 바꿔 쓰고 관심 가지며 돌봐야 할 공간을 '임시'라 생각하며 버티며 살았다.
영원히 살 내 집은 아니어도, 지금 사는 곳이 전부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전부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전부다. 본 게임, 몸풀기 게임 따로 없다. 그냥 지금 이게 다다.
나중에 넓은 마당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면,
나중에 통장에 100억 박아두면,
나중에 몸 건강해지면,
나중에 좋은 직장으로 옮기면,
나중에 좋은 사람 만나면,
나중에 결혼하면,
나중에 여행 가면,
나중에 나중에 모두 나중에.
그러니까, 지금은 임시로 잠깐 사는 거야.
그 나중을 위해 산다. 그 나중은 없는데 말이다.
뭔 나중이 있다고 그래? 지금 밖에 없다니까.
"아이~ 이거 진짜 똥 많이 나온다~"
똥 나오는 모나미 볼펜 쓰면서 똥 나온다 불평을 한다.
"다 갖다 버려~"
남편이 소리친다.
"그래도 나오는데 어떻게 버려? 아깝잖아."
우린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집에 있는 아까운 필기도구, 똥 나오는 볼펜까지 모두 쓴 다음, 내가 좋아하는 '시그노 다크 그린' 쓸 시간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임시로 쓰고, 임시로 사귀고, 임시로 먹고, 임시로 일하고. 임시로 머문다.
아무리 바둥거려도 100년 사는 인생. 임시로 살 시간이 어딨다고 자칭 '작가'가 똥 나오는 볼펜을 이면지에 끄적거리냐? 16억 6천만 원짜리 2,000개 다이아몬드 박힌 이태리 수제 펜은 아니더라도, 똥 나오는 볼펜 아깝다고 쓰고 있지는 말아야지. 그 펜을 쥐고 뭔가를 쓰고 있는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을 쓰고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