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의 남녀가 전남 강진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 친구도 선후배 사이도 직장 동료도 아니고, 물론 부부도 애인도 아니다. 그들은 그냥 '독서모임 멤버들'이었다.
몇 해동안 2주에 한 번씩 얼굴을 봤다. 매번 나오는 멤버들은 달랐지만 얘기하는 게 재밌었다.
남들은 하나도 재미없다는 책 얘기를 카페 쫓겨날 때까지 하고 또 했다. 물론 얘기의 반은 잡담이고 사담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어색한 얼굴을 줌 화면에 내밀고, 어수선한 뒷배경을 감춰가며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멤버 중 한 명이 춘천문화재단 이벤트 '일당백 프로젝트'에 제안서를 넣었다. 그러니까 재밌고 실험적인 아이디어에 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어 실행 해나가게 한다는 쓸모있는 딴짓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참, 살다 보니 나라에서 이런 신박한 일도 벌이고.
<일독일행> 한 번의 독서, 한 번의 여행.
이 제안이 덜컥 합격했고, 거금 백만 원을(세금 빼고 90만 원)을 손에 쥔 멤버가 호기 있게 외쳤다.
[책 읽고 여행 갈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아침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까톡.
누가 새벽 댓바람부터 카톡을? 눈 한번 홀기며 단체톡을 게슴츠레 들여다보던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게 뭐여?
난 손가락을 부들거리며 글자를 쳤다.
[저요. 저 갈래요.]
4인 멤버. 이 프로젝트를 주창한 분을 빼면, 딱 3명 모집 공고였다. 코로나 시국이니까.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니 어쩌니 하는 얘기는 다 쓰잘데 없다고 그렇게 '열심히'만 살면 결국 등골만 빠진다고, 나름 속담을 정리하던 시점이었다.
어쩌다, 아주 조금, 그날만 일찍 일어난 3마리 새가, 엉겁결에 1박 2일 여행이라는 큼직한 지렁이를 꿀꺽 입에 물고 삼킨 거다.
야호!!!
까톡까톡까톡.
[아, 놓쳤다.]
[마감인가요?]
[아쉽다.]
안타까운 신음소리를 내뱉은 톡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선택받은 우리 여자 2, 남자 2는 여행 전 책도 선정하고 예비모임도 했다.
정약용. 우리가 심사숙고 끝에······,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쩌다 건진 주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의지의 한국인, 어마어마한 책을 복숭아뼈가 세 번 구멍 날 정도로 앉아서 집필하신 분이었다.
18년 유배지 강진으로 8월 2일 우리도 스스로 즐거운 귀양길에 올랐다. '목민심서'를 그래도 어찌어찌 모두 다 읽고 난 뒤였다.
1. 반칙이다. 이렇게 눈과 귀가 호강하는 건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강진은 '정약용'이다. 어딜 가도 그의 흔적을 피해 다니기 힘들 정도다. 그중에 으뜸은 백운동 12경 중 1 경인 옥판봉.
<정자에서 바라본 백운동 절경 중 으뜸인 1경>
정자에 앉아 눈에 들어온 풍경은 한 마디로 쥑인다. 저 멀리 월출산이 보이고, 소박한 한옥과 초가지붕이 나무 사이로 보이고.
우리는 나란히 그 정자에 몸을 뉘었다. 귀로는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이며 뺨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 생각이 안 나요. 두고 온 일 생각도, 미래 생각도."
6개월 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겪었던 멤버 한 명이 나직이 읊조렸다.
두 번째 호강은 머물렀던 '다향소축', 한옥 숙소였다. 주인아주머니가 자랑스레 보여주던 하얀 목화꽃, 뒷산에 하늘 높이 솟아오른 대나무, 드넓은 잔디.
<뒷마당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숙소 뒷마당 대나무 숲>
<숙소 마루에 앉아 바라본 풍경>
푹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6시, 내리는 비를 대청마루에 앉아 한참동안 쳐다봤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한두 명씩 자리를 털고 일어난 멤버들과 함께 마루에 앉아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빗소리를 듣는다.
투드득투드득.
참새가 빨랫줄에 내려앉아, 빨랫줄에 매달린 물방울을 푸드득 털어낸다. 비온다고 기어나온 지렁이를 부리로 콕 쪼아 먹기도 하고. 뻥 뚫린 하늘의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비를 뿌렸다 거두었다 하고.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에도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숙소에서 나와 계획에도 없던 백련사에 들렸다. 어디에나 피어있던 '배롱' 진분홍 꽃이 만발이다. 신발을 벗고 만경루에 올라서자마자.
아.
우리 모두 감탄사를 절로 토해냈다.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백련사 만경루에 앉아 바라본 풍경>
보이는 3개의 창이 다른 이야기를 한다. 녹색 파릇한 여름을, 진분홍 배롱꽃과 녹색을, 그리고 꽃과 저 멀리 바다를.
미친 풍경이다.
아무도 없는 그 만경루에서 우리는 사진도 찍고, 아름답다 백번을 감탄하고, 그 마룻바닥에 앉아 오래도록 풍경을 눈에 담았다.
또 아무 생각이 안 났다.
2. 반칙이다. 이렇게 변화로운 날씨마저 재밌는 건
새벽 4시에 출발해서 1박 하고, 다음날 새벽 1시에 도착한 꽉 찬 일정.
무슨 날씨 변화가 그리 심한지. 근데 그게 참 신기하다. 차를 타고 내려갈때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차 밖으로 나서면 뚝 그친다. 밤새 한옥 처마에 들치는 빗소리, 기와에 떨어지는 장대 빗소리를 듣다가, 아침 숙소를 나올 때는 비가 뚝, 그친다. 출렁다리 710미터 왕복을 넘어갔다 오는데, 살랑살랑 비올 바람이 불다가, 차에 도착할 쯤에야 비가 두두둑.
뭐야. 이거.
누가 아이템 썼어?
버럭 소리지르며 차안으로 급히 뛰어든다.
그런 사소한 것에 웃음을 터뜨리니 여행이 재미있을 수 밖에.
3. 반칙이다. 함께 먹는 음식이 그리 맛있는 건
회춘탕도 가격 대비 신통찮았고, 비 오는 강진 시내를 돌아다니며 겨우 구한 회도 몇 점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도 맛있었다. 휴게소에서 먹었던 시원한 콩나물 국밥도, 매운탕에 햇반 말아먹은 것도 맛있었다.
홍어삼합을 인상 찌푸리며 먹어보고, 생강 냄새 풀풀 나는 떡갈비도, 신선한 육회도 먹어보고, 간장게장 등껍질에 알뜰살뜰 밥도 비벼먹어 보고.
다 맛있었다.
큭, 공짜라 그랬나, 아니면 기분으로 먹어서 그랬나?
<이후에 3번 상이 더 나왔다>
4. 반칙이다. 함께 나누는 얘기가 그렇게 재밌는 건
말없는 사람도 수다쟁이로 만드는 모임이긴 하다. 그런데 정약용 책을 읽고, 백운동 12경, 다산초당, 다산 박물관, 사의재까지 두루두루 둘러보니, 할 얘기가 어찌나 많던지. 무던히도 수다를 떨었다.
그래도 가장 말을 한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다산 박물관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해설사였다. 코로나 시국이고, 박물관인 데다 너무 박학다식한 정약용이었으니. 그분이 4명의 우릴 반기는 마음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몇 분이나 하면 될까요? 일정 바쁘실 테니 맞춰드릴게요."
우와. 완전 프로다. 시간까지 맞춰준다니.
"저흰 30분이요."
꿀꺽, 우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아침도 못 먹어 배도 고프니 빨리, 빨리.
아는 것도 많으니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게다. 메모광이었던 정약용 덕분에 해설사 분 머리가 터질 지경 아닐까? 그만큼 모두 기억하기엔 힘든 순간도.
"그러니까, 이분이 정약용의...?"
해설사가 고민하면, 멤버 중의 한 명이 말한다.
"사위?"
"네 맞습니다. 사위죠."
"그러니까, 이분이 정약용의...?'
해설사가 머릿속을 마구 뒤지고 있으면, 멤버 중의 한 명이 또 말한다.
"둘째 형님?"
"네 맞습니다. 둘째 형님."
어험~~~. 그래도 우리는 이미 정약용 책 읽고 간 사람입니다. 그것도 독서모임 멤버들이라구요.
30분 해설이 1시간 반을 넘어갔다. 마지막 스토리, 정약용 아내가 유배지의 남편에게 보낸 진분홍 치마. 거기에 시집가는 딸에게 보내는 글과 그림을 써보낸 얘기는 감동이다.
배도 고프고, 이젠 다리까지 휘청거렸지만. 다 끝났다니 반갑기도. 흡족한 미소로 해설사도 우리를 방면해준다. 이해가 된다. 해설사의 미소가. 우리는 들었고, 물었고, 아하, 고개를 끄덕였고, 눈을 반짝였으니.
5. 반칙이다. 그렇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경험한 건
단체로 여행가서 풍경 멋있다고, 함께 주저앉아 그림 그려본 사람?
저요!
지나가는 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생가에 들렸다. 네 명이 쪼르르 높은 마루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으로 땀을 식히는데, 모임장이 잠깐 차에 다녀오더니 손에 시원한 냉커피와 색연필, 종이를 들고 왔다.
"그림 한 장 그려보죠?"
우린 그 말 한마디에 시원한 커피를 들이켜며, 눈에 보이는 풍경을 손으로 그렸다.
"와우. 이렇게 밖에 나와 그림 그려본 적은 처음이에요."
"저두요."
"나 그림 진짜 못 그리는데. "
우리가 그린 그림은 살아온 인생만큼 각자 다른 시각이었고, 그 속엔 돌담도, 우물도, 장독대도, 한옥 처마도 보였다.
또 아무 생각이 안 났다.
6. 반칙이다. 여행이 이렇게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건
여행 다녀온 다음 날, 여행 갔던 멤버들 단톡방에 이런 톡이 올라왔다.
[꿈꾼 것 같네.]
[꿈이었는데……. 네 명이 함께 꾼.]
[아직도 계속 생각나요.]
[가을에도 한번 추진해서 가요.]
[저 꼭 가고싶어여 그때두.]
[저도 꼭!!!!]
무슨 복을 많이 지어, 이런 코로나 시국에 이런 귀한 선물을 받았을까.
꿈에서라도 정약용 선생을 만나면, 여행으로 다져진 '내적 친밀감'을 한껏 발휘하여, 한걸음에 다가가 덥석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땡큐 베리 머치 for your gift. 약용 정.]
다산 박물관에서 본 정약용이 쓴 영어 교습서를 기억해보면, 이 정도 영어는 쿨하게 받아치실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