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다큐가 아니다.
"언니! 넷플릭스에서 'My Octuopus Teacher'라는 다큐 봐봐. 진짜 재밌어."
어젯밤 미국에 사는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진짜 재밌다니, 다음날 소파에 늘어져 넷플릭스를 켠다. 누워보더니 좀 있다 앉아보고, 점점 더 눈을 반짝이며 몰입한다. 커피 타서 지나가던 남편도 처음엔 서서 보더니 결국 앉아서 함께 1시간 25분 다큐를 모두 봤다.
재밌다. 진짜.
그래도 이런 분은 바로 PASS 하시라.
1. 볼 것도 많은데 뭔 다큐를 보냐?
볼 게 넘치는 세상이다. 너 나할 것 없이 찍고, 본다.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없던 세상에는 뭐하고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난다. 로맨스/멜로, SF/판타지, 공포/스릴러, 드라마, 미스터리, 어드벤처, 코미디. 볼 것도 많은데, 뭔 다큐냐? 하시는 분은 바로 여기서 PASS!
2. 내 삶이 다큐다. 하시는 분
내가 사는 현실이 고구마 백 개 먹은 '다큐'인데, 또 '다큐'를 보라고? 치맥 마시고 뜯으며. 현실과 완전 딴판인 다른 평행우주 맛보러 가즈아!!!!!! 하시는 분은 PASS!
3. 인간 얘기도 많은데, 뭔 문어 얘기?
인간 드라마 다 보고, 댕댕이, 고양이 얘기도 찾아보고. 시간 남으면 귀여운 꼬마돼지 베이브나 영국 곰 패딩턴도 만나보고. 아무리 그래도 문어 얘기까지는 마음이 안 간다면 바로 PASS!
그럼에도 내가 이 다큐가 좋은 이유는?
1. 이건 다큐지만 다큐가 아니다.
다큐: [명사]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상물이나 기록물.
처음엔 제목이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길래 '문어 닮은 선생님' 얘기인가 보다 했다. 보고 나니 이건 다큐라고 딱 잘라 말하기 아쉽다. 보면서 소름이 쫘악 돋고(공포/스릴러), 코가 찡하더니 눈물이 삐질 나고(드라마), 마음이 짜안하게 슬프고 애절하다.(로맨스/멜로). '문어' 나온다고 자연 다큐 아니고, 요리 프로그램은 더더욱 아니다.
2. 영상도 스토리도 아름답다.
남아공 영화감독 크레이그는 힘든 사회생활로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대서양 바다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바닷속 하늘거리는 해초 숲을 헤엄치는 새로운 친구 '문어'를 만나게 된다. 크레이그는 300일 동안 매일 잠수장비도 없이 바다로 그 친구를 만나러 간다.
물론 영상도 아름답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어떤 대상이 궁금해 그녀를 만나러 간다는 건 '사랑'이다. 그게 더 아름답다.
3. 문어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
주변 색과 텍스처까지 흉내 내는 변장술의 달인 문어는 점차 경계를 풀고, 크레이그와 신뢰를 쌓아간다. 마음이 가면 그 대상이 잘 살길 바라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모두 해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문어가 공격당하고 상처 입고 죽어갈 때도, 크레이그는 묵묵히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건 모두 '문어의 삶'이고 '문어가 감당해야 할 삶의 몫'이기에.
그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영상으로 보면서도 문어를 공격하는 상어를 잡아 패대기치고 싶었는데......
4. 문어가 선생님이다.
사랑은 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이다."라고.
지혜는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그 둘 사이에서 삶은 흘러갑니다.
-<아이 앰 댓>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그게 모든 것이고,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 문어 한 마리와의 교감을 통해 크레이크의 삶은 변화한다. 문어는 한 마디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크레이그는 스스로 이방인이라 느꼈던 자신도 자연의 일부라는 겸손을, 삶의 지혜를 문어에게서 배우게 된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 선생님. 존재만으로도 배움을 보여줄 수 있는 문어 이야기, <나의 문어 선생님> 강추다.
"우리 이제 문어 먹지 말자."
다큐를 다 보고 일어서는 남편에게 난 뜬금없이 결심부터 선포하고 본다.
"낙지도 오징어도 먹지 말자."
남편은 '그래. 문어는... '하는 표정이었다가, '낙지도? 오징어도?' 하는 표정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다리에 촉수 보면 문어 선생님 생각날 것 같아. 그렇게 영리한 애들을 어떻게 먹어? 살려고 온갖 조개로 변장하고, 인간이랑 우정 나누고, 알 부화시키고 죽어가는... 그런 생명체를 어떻게 먹느냐고?"
"?!?!?!"
쓸데없이 다큐 보고 울부짖는 마누라를 뒤로 하고 남편은 그 자리를 뜬다.
그 순간 두둥 내 머릿속에 갑자기 든 생각이...
'어제 비~싼 오징어 2마리 13,500원에 사서 무쳐먹고 볶아먹고. 오늘 저녁은 남은 오징어볶음에 밥 비벼 먹기로 했는데......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