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은 음식이 아니잖아
나는 먹는 것에 별 즐거움이 없다. 하루 삼시 세 끼에 간식에 야식까지 평생 먹는다 생각하면, 세상 사는 즐거움의 반은 놓치고 산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 나와 달리 딸내미는 미각도 뛰어나고 새로운 음식에 호기심도 많다.
학교 급식에서 입에 맞는 새로운 반찬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온 것처럼 흥분해서 밥 먹을 때 말이 많아졌다.
“오늘 점심에 나온 반찬인데 맛있었어. 고춧가루로 무쳤는데 짭조름하고 꼬들꼬들하고 씹을수록 쫄깃쫄깃했어.”
“오징어채 볶음인가?”
“아니야. 야채던데. 매콤하면서 달달했어.”
“무말랭이 무침인가 보다.”
“맞아. 그런 것 같아. 무말랭이 무침.”
딸내미가 어제 흘린 코피 탓인지 컨디션이 난조다. 느긋하게 맛있는 것 먹으며 흘린 코피를 보충하기로 한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지만 딸내미의 선명한 빨간 코피가 그 모든 욕망을 누른다.
오늘은 어제 투어에서 먹어본 메뉴델리아를 다른 식당에서 먹어보기로 한다. ‘메뉴델리아’는 10유로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전식, 본식, 후식을 모두 먹을 수 있는 런치 코스 메뉴이다. 푸짐하고 가격도 저렴하면서, 스페인 음식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광객들에겐 인기가 많다.
어제는 스페인어 메뉴판을 보며 번호를 무작위로 찍어 메뉴델리아를 먹었다. 미리 메뉴판을 공부하고 가면 좀 나을까 싶어 식당을 검색하고, 메뉴델리아 점심 메뉴판 사진까지 입수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숙소 침대에 딸내미와 둘이 앉아 구글 번역기를 돌린다. 핸드폰에 스페인어 단어 하나하나를 입력하고 결과를 기다린다.
패스토 소스와 치즈 강판, 포장병아리 콩참치, 섬세한 치즈 샐러드, 마늘 볶음 쌀토끼, 고립된 치즈와 포장병아리
번역기가 전달해 준 메뉴를 하나씩 우리말로 확인할 때마다 웃음이 터진다.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뒤로 넘어간다.
“엄마! 치즈 강판이래. 오늘 후식은 고립된 치즈와 포장병아리 어때?”
한바탕 웃고 나니, 이틀 연속 덥고 힘들었던 바르셀로나 여행에 여유가 생기고 숨통이 트인다. 번역기로 돌린 메뉴를 하나씩 옮겨 적은 소중한 수첩을 품고, 라폰다 식당을 의기양양하게 찾아갔다. 다 덤벼! 우리에겐 한국어 번역판 메뉴가 있다!
람블라스 거리 대로변에 위치한 라폰다 식당 문 앞에 ‘메뉴델리아’ 메뉴가 붙어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여다본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인가? 그 메뉴 어디에도 스페인어로 된 쌀토끼도 고립된 치즈와 포장병아리도 없었다. 뇌세포가 잠시 연결고리를 잃는다. 뒤늦게 다른 범위를 공부해왔다는 것을 깨달은 수험생처럼 손발에 힘이 빠지고 식욕마저 잃는다.
‘메뉴델리아’는 ‘오늘의 점심’이었던 것이다.
매일 그 날의 식재료에 따라 식당마다 오늘의 메뉴가 바뀌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고 믿었으니. 메뉴 번역에 너무 공을 들인 탓인지, 웨이터가 가져다준 메뉴판을 들여다볼 에너지도 없다. 메뉴델리아를 번호로 선택하느니, 먹물 빠에야를 먹어보기로 전략을 수정한다. 스페인 오면 꼭 먹어보고 싶었던 먹물 빠에야는 오징어 먹물을 이용한 스페인 대표 볶음밥이다.
“씬 쌀!”
그 와중에 ‘소금 빼주세요.’라는 스페인어를 수첩에서 찾아, 빠에야를 주문할 때 잊지 않고 외친다. 스페인 음식은 이 말을 외치지 않으면 음식이 너무 짜서 먹기 힘들 수도 있다 해서.
드디어 기다리던 먹물 빠에야가 커다란 냄비에 한가득 담겨 나왔다.
“으흐흐흐. 엄마! 이거 너무 새까맣다. 그리고 너무 많은데. 이걸 언제 다 먹어?”
우리는 새까만 검댕 같은 비주얼에 먼저 놀라고, 깊은 냄비 가득 들어있는 푸짐한 양에 또 놀란다. 김이나 미역, 짜장면 등 까만 음식이 낯설지 않은데, 시꺼먼 진흙탕 속에서 굴어 다니는 검은 쌀알은 충격이다. 딸내미가 한 숟가락 조심스레 떠서 입에 넣고 씹는다.
“엄마! 이 맛은......”
혀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말할 만큼 미각이 뛰어난 딸내미가 숟가락을 들고 말을 잇지 못한다. 떨떠름한 표정에, 냄비로 직진하지 않고 아직도 허공을 헤매는 숟가락을 보니 맛있다 쪽은 분명 아니다.
딸내미의 생략된 뒷말이 궁금해진 나도 서둘러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 씹는다. 짜다. 굵은소금 한 줌을 우리 먹물 빠에야 냄비에 쫘악 뿌린 게 분명하다. 이렇게 짜다니, 굵은소금을 입안에 털어 넣는 맛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더운 날씨 때문에 염분이 다소 강한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고 이건 심하다. ‘씬 쌀!’ 이라는 내 스페인 말을 못 알아들었나? 아니면 소금을 빼고 준 게 이 정도인가?
딸내미는 배가 몹시 고플 텐데 딱 두 숟가락 퍼먹고 포기다. 미각이 덜 발달하고 딸내미보다 인내심이 조금 더 있는 나는 세 숟가락까지는 퍼먹는다.
“딸냄!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기서 빠에야 먹은 사람들은 조금 짜도 맛있다고 박박 긁어먹었다는데......”
냄비에 가득 남아있는 빠에야를 아쉽게 쳐다본다. 아깝지만 할 수 없다. 소금을 음식이라고 입에 털어놓고 씹고 앉아있을 수는 없잖아. 24유로 넘는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 배가 고프다.
우리나라였다면 물어봤을 게다. 웨이터 부르고 주방장 불러서 음식이 왜 이리 짠지, 원래 이런 맛인지, 눈 빤히 쳐다보고 궁금하다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천진난만한 시선으로 괴롭혔을 것이다.
그런데 왜 못 물어봤을까? 처음 여행 와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니, 궁금하면 물어보면 될 것을. ‘내가 너네 음식도 문화도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음식에 이견을 제시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었을까? 이제 라폰다 식당의 짜디짠 먹물 빠에야는 우리에게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미제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우리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추로스와 상큼한 체리 한 바가지를 사 먹고 입 속에 남아있는 짠맛을 겨우 달랬다.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다른 식당에서 해물 빠에야를 맛있게 먹고 그 몹쓸 추억을 조금은 희석시켰지만, 먹물 빠에야를 다시 도전할 용기까지는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