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애물단지와 사기꾼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 애물단지를 구입했던고

by 글쓰는공여사


‘바르셀로나에서는 티켓 하나로 지하철, 버스, 트램, 산악기차인 푸니쿨라까지 이용가능하다. 특히 T-10 티켓은 10회를 여럿이 함께 쓸 수 있고, 낱장 10개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


바르셀로나 교통정보 수집을 여기서 끝내야했는데, 중학생 아들과 바르셀로나 여행을 다녀온 분이 친절하게 올려놓은 글을 읽은 게 화근이었다.

‘T-10으로 가우디투어하고 야경 보면 거의 다 써요. 매번 T-10 티켓을 네 번 사는 것보다 T-50을 처음부터 사는 게 경제적일 것 같아요.’


‘일 것 같아요.’를 ‘이예요.’로 잘못 알아들었다.

“엄마, 안사도 될 것 같은데......”

의심의 눈초리로 만류하는 딸내미 조언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T-50 티켓을 구입했다.


30일 동안 바르셀로나의 모든 교통수단 50회 이용 가능, 42.50유로, 약 57,000원.


티켓에는 사용할 때마다 뒷면에 남은 횟수가 찍혔다. 밤마다 오늘은 몇 번 사용 했나 침대 위에 첫날 구입한 T-10과 T-50 두 장을 깔아놓고, 뒷면의 숫자를 확인했다. 예상과 달리 숫자가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6박 7일 일정이라 빨리 써야하는데, 숙소가 교통요지에 있으니, 심지어 지하철이나 버스를 한 번도 타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 애물단지를 구입했던고...... 딸내미에게 말도 못하고, 밤마다 들여다보며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누구나 모르면 실수할 수 있다고 나를 다독이고 겨우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떻게든 지하철이든 버스든, 안되면 산악기차라도 타러가서 숫자를 줄여야지 집착이 심해져 갔다.

_7191693.JPG 애물단지 교통 티켓

야경 투어를 가던 날이었다. T-50을 딸내미와 나눠 쓰려고 지하철 티켓을 투입구에 넣었다. 나는 아무 문제없이 통과했는데, 딸내미 차례에는 넣어주면 토해내고 넣어주면 토해냈다. 삑삑거리며 토해내는 소리에 저 멀리 서있던 지하철 역무원이 다가온다. 내가 먼저 답답함에 하소연한다.


“이거 안 되는데요.”

“뭐라뭐라뭐라.”

“이거 여기 넣었는데 안 되는데, 내 티켓 체크 좀 해줄래요?”

“뭐라뭐라뭐라.”

지나가는 개와 대화해도 이보다 낫겠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나는 영어로, 역무원은 스페인어로 자기 할 말만 뱉어내고 못 알아들으니 서로 눈만 뛰룩뛰룩 굴린다.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던지, 지나가던 중년의 아랍 아저씨가 통역을 자청하고 나선다.

역무원의 ‘뭐라뭐라뭐라’는 ‘T-50은 두 사람이 동시에 못 쓰니, 한 사람은 티켓을 구매해야 해.’였다. 밤마다 남은 T-50을 어떻게 빨리 써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둘이 동시에 못 쓴다면 남은 5일 동안 나 혼자 43번 지하철과 버스를 타야 한다고?


“5일 후면 난 로마에 가야 해. 5일 안에 혼자 43회를 다 쓸 수는 없어. 뭔 방법이 없을까? T-10으로 바꿔줄 수는 없어?”

그 말을 스페인어 통역으로 전해들은 역무원은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통역 아저씨가 자기 티켓으로 딸내미를 일단 지하철 역 안으로 친절하게 들여보내주고, 자기 티켓이 T-10이고 6회 남았으니 서로 맞바꾸자 한다. 그러니까 거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자기 티켓 6회 = 내 티켓 43회

6 = 43


‘same’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언어 장벽에 갇힌 우리를 구해준 고마운 분이지만, 6과 43이 같을 수는 없잖아? 내가 스페인어를 못하지, 산수를 못한다고는 안했다. 이 사기꾼아~


“난 43회, 넌 6회 남았는데, 이게 어떻게 same이냐? 딸내미 티켓 2.15유로, 여기 동전 있어. 어쨌든 고맙다. 잘 가.”

난 2.15유로를 아저씨 손에 올려놓고, 딸내미 손목을 붙잡고 뒤도 안돌아보고 지하철을 타러갔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해야한다고 가방 단속만 열심히 했는데, 언어로 후려치는 사기꾼을 만났다 생각하니 가슴이 한동안 진정되질 않았다.

_7181516.JPG 피카소 미술관을 찾아가는 중

이놈의 교통티켓을 어떻게 처분하나 계속 고민이었다. 야경 투어 한국인 가이드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가이드가 필요하다 하면 싼 가격에 넘길 수도 있고, 필요한 사람과 연결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다. 어떻게든 끝까지 손해 보지 않으려는 집착이 나를 계속 구차하게 만들었다. 내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녀는 딱 이렇게 말했다.

“아이, 어쩌다......”


그게 다였다. 정보 수집 능력도 없으면서,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 뒷감당도 못해 쩔쩔매는 그런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까짓 쓰고 남은 티켓 몇 만원에 이런 기분까지 들다니, 남은 티켓 숙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든지, 아니면 숙소 앞 슈퍼마켓 아저씨에게 선심 쓰듯 주고 가리라 애써 마음을 정리했다.


그 티켓의 운명은 숙소 테이블 위였을까, 아니면 슈퍼마켓 아저씨 손 안이었을까?


바르셀로나 일정 마지막 날, 38회 숫자가 선명하게 찍힌 T-50 티켓은 어학연수 온 한국청년에게 20유로에 넘어갔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한국 청년은 내가 건넨 T-50 티켓을 앞뒤로 만지작거리며 여러 번 물었다.

“이 티켓 38회 남은 거 맞죠? 8월 15일까지 쓸 수 있는 거 맞죠?”


바르셀로나에 십대 딸 데리고 온 한국의 중년 아주머니가 사기 치기엔 20유로는 좀 적은 액수 아니니? 청년!

애물단지를 처분하고 돌아서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우리는 그 20유로로 누드해변 시체스로 가는 기차 티켓을 샀다.


누군가 흘린 말을 정확한 정보라 어설프게 믿고, 밤마다 고민하고, 사기 당할 뻔 하고, 자존심에 상처도 입었다.

손해 좀 보면 어떻다고, 실수 좀 하면 어떻다고, 그걸 만회하려고 그리 속상해 했는지? 수입과 지출을 꼭 맞추려는 내 삶의 금전출납부가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에서부터 내 삶을 꼭 조이던 나사가 조금씩 풀릴 조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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