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스] 누드비치에 누워

진짜 누드로?

by 글쓰는공여사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지중해 누드비치 시체스에 갔다. 여행 속에 또 다른 여행을 가면서, ‘지중해’라는 단어보다 ‘누드비치’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일고 마음이 들뜬다. 말로만 듣던 누드비치에 드디어 가보는구나. 궁금하다. 진짜 누드로? 다 벗고?


중국에서는 2014년에 하나 밖에 없던 누드비치를 폐쇄했다한다. 이유는 그 넓은 해변에 여성은 단 한 명도 없고, 홀딱 벗은 남정네들만 우글거려서란다. 다른 사람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는 중국인 특유의 기질 때문에, 연휴에는 사 오백 명의 벗은 남정네들로 해변이 거대한 야외 남탕으로 변했다 하니, 상상만 해도 뇌가 힘들다.


시체스 비치에 도착했다.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바닷물은 찰랑찰랑 모래를 적시고 햇빛에 반짝거린다. 뭐, 그런 풍경이야 우리나라 동해안에도 다 있는 것이고, 수영복을 담은 배낭을 짊어지고 서서 해변의 사람들을 순식간에 스캔한다.

_7202034.JPG 시체스 해변

스캔의 목적은 ‘진짜 누드인가?’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 나체 실물을 어찌 접하나, 그 시선의 충격을 내가 어찌 옆에 사춘기 딸내미 끼고 감당하나, 호기심에 걱정이 더해져 마음이 요동친다.


뚜뚜뚜뚜. 수건 깔고 모래 위에 누워있는 남자 1인, 다행히 수영복 팬티는 착용했다. 뚜뚜뚜뚜. 모래장난 하는 작은 꼬맹이들 3인, 그 아이들은 다 벗고 다녀도 이상할 게 없으니 그냥 넘긴다. 뚜뚜뚜뚜. 아빠의 넓은 등짝에 선크림 바르느라 어설픈 손짓을 해대는 아이도 스킵. 뚜뚜뚜뚜. 드디어 잡혔다.


알록달록 비치파라솔 아래 선글라스를 쓰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여자 1인. 하늘을 향해 봉긋 솟은 몽글한 젖가슴이 보인다. 내 마음이 콩닥거린다. 다행히 아슬 하긴 하지만 수영팬티를 걸치고 있다.


시체스 비치는 상의만 탈의 가능한 해변이란다. 그래도 내 인생 처음으로 상의 탈의한 여자들을 공중목욕탕이 아닌 밝은 햇살아래 쳐다보고 있으려니,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난감하다.


그러다 벗은 사람도 주위 사람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를 접하고 나니 아무 일도 아닌 듯 무심히 행동하느라 나만 혼자 멋쩍다. 편견에 물들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딸내미는 어떻게 느꼈을지 물어볼 껄 그랬다.


하루 종일 쓰는 비치파라솔과 베드를 빌렸다. 차분히 파라솔 아래 베드에 누워 사람들을 관찰하니,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 천 쪼가리 조금 붙은 앙증맞은 비키니를 많이 입었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만 원피스 수영복 차림이다. 나는 할머니 수영복 차림이고, 딸내미는 연녹색 비키니 위에 그물 윗옷을 입고 논다. 그래도 강렬한 햇빛 때문에 가우디 투어 때도 안 썼던 선글라스를 딸내미가 쑥스러워하며 처음으로 꺼내 쓴다.


햇볕은 따가워도 바람이 살랑거려 파라솔 안은 시원하다. 딸내미는 수영은 하지 않고 물장구도 치고, 사진 찍고 음악 들으며 베드에 누워 혼자 잘 논다. 나도 함께 누워 작은 솜처럼 동동 떠있는 하얀 구름을 오랫동안 올려 본다.

20140720_172000.jpg 시체스 해변의 파란 하늘


아무 것도 안한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시체스 비치에서 시체처럼 누워 쉰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우리는 여행을 잠시 멈추고 그 순간 그 자리에 존재한다. 목표지향적인 ‘행동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마음이 선회한다. 과거를 다시 살고, 미래를 미리 사는 고통에서 벗어나, 지금 존재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존재양식으로.


눈앞에는 바다와 내려쬐는 햇빛과 이 시간 속에 온전히 존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맨발에는 부드러운 모래 감촉이 느껴지고, 살랑거리는 바람은 뺨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날린다. 나는 지금 여기 살아서 존재한다. 하늘을 향해 가슴을 쭉 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잠시라도 놓치면 큰일 날 것 같던 긴장의 끈을 지중해 바다에 잠시 풀어 놓는다.


우리가 누워있는 베드에서 널따란 비치 수건 위에 다정하게 손을 잡고 누워 있는 젊은 연인이 보인다. 햇볕 아래 드러난 그들의 육체는 당당하고 아름답다. 그들에겐 지금 시간이 멈춘다.


그들도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토라지고, 불안하고 두렵고 힘든 시간을 겪겠지. 그래도 주말이 되면 주섬주섬 수건 챙기고, 비치에 와서 손을 꼭 잡고 있겠지. 그러면 삶은 불행에서 서서히 중화되고, 조금씩 더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지.


행복하기 위해, 행복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얼마나 적은가! 가장 소소한 것, 가장 조용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한 번의 숨결, 한 줄기 미풍, 한 번의 눈 맞춤. -프리드리히 니체


수영을 하지 않았는데, 점심 먹을 시간이 되니 우리는 어김없이 배가 고프다. 가볍게 옷을 걸치고 타박타박 걸어 피자를 사먹고 다시 돌아와 그대로 눕는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도 시체스 비치에서 행복하게 멈춘다.

_7202048.JPG 맛있었던 시체스 해변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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