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한국 가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딸내미를 위해 ‘남부 환상 투어’라는 멋진 이름의 폼페이 일일투어를 신청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하여 나폴리를 경유, 폼페이와 아말피 해변, 포시타노 마을을 둘러보고 밤 10시에 테르미니 역에 도착하는 힘든 일정이다.
한국 관광객을 꽉 채운 대형버스가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곳’ 1위에 뽑힌 해안 절벽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달린다. 좁다란 해안 도로를 따라 버스가 코너를 돌 때면, 깊고 푸른 지중해 위를 떠다니는 환상에 빠진다. 그래서 ‘남부 환상 투어’인가?
폼페이에 도착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참혹한 폐허로 변하고, 시민 2,000명의 시간이 동시에 멈춘 도시. 탁자 위에는 흰 재를 뒤집어 뜨고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사람의 화석도,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듯 두 손을 마주하고 웅크려 앉아있는 화석도 보인다.
그날이 자신들의 인생 시계가 멈추는 날인지도 모르고, 가족들과 소소한 얘기를 하고 아침을 먹고 하루를 계획했을 텐데. 황망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간 사람들이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구경 온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호기심에 자세히 들여다보는 열세 살 딸내미와는 달리, 나는 삶과 죽음의 허망함에 자꾸 다리에 힘이 풀린다.
“포시타노는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떠나는 순간 현실로 기억되는 꿈의 마을이다.” - 스타인벡- -
스타인벡이 그렇게 묘사한 포시타노 마을이 나에게는 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화장실이 급했기 때문이다. 점심에 먹은 피자가 탈이 났나 보다. 날은 덥고 짐은 무거운데, ‘꿈의 마을’에는 공중화장실이 없다.
“딸냄!! 화장실 좀 찾아봐줘. 엄마 급해.”
1,000 분의 1초 단위로 생각이 옮겨 다니는 우리의 뇌는, 주의 집중 대상을 순간마다 단 한 가지만 갖는다 한다. 그때 나에게는 단 한 가지, 화장실 표시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언덕 위의 집도, 아기자기한 가게도 안중에 없다.
“엄마, 여기 가게로 들어와 봐. 화장실 있는 것 같아.”
배를 움켜쥐고 실신 직전인 엄마를 딸내미가 극적으로 구한다.
급하게 들어선 가게에는 문어 모형 열댓 마리가 천장에 매달려있다. 가게에 들어왔으면 물건을 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내 뱃속은 그럴 여유도 안 준다. 화장실부터 찾아들어가는 민망함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하며, 문어도, 소라도 불가사리도 그냥 지나친다.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나니, 비로소 천장에 매달린 문어 전등도, 바다 냄새 물씬 풍기는 컵들도 보인다. 화장실부터 들어갔던 민망함을 회복하려, 흰 바구니에 가득 담긴 빨간 불가사리 장식품을 만지작거린다.
뻔뻔스럽게 스스로에게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란 이름을 붙인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종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만가지 그럴듯한 사상과 지식으로 머릿속을 채워도, 생존과 번식이 우선이다. 급한 볼일 생기니 ‘화장실’ 딱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포시타노 마을을 지나 내려간 아말피 해변에는, 여행 온 한국 젊은이들이 쾌속 보트로 물살을 가르며 비명을 질러댄다. 비명은 다 질렀는지 이번에는 보트에서 내려 뭘 주섬주섬 꺼내서 펼친다. 커다란 태극기다. 기대하지 않았던 물건의 등장이 낯설다.
아말피 해변은 어느새 조국의 독립을 위해 결연히 일어선 한국 독립투사들의 생생한 역사 현장이 된다. 태극기를 흔들며 단체 사진까지 찍는다. 손가락 깨물어 혈서 쓰는 장면을 목격하기 전에 시선을 얼른 바다로 돌린다.
밤 10시가 넘어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다. 늦은 밤 위험한 테르미니 역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딸내미 손을 꼭 잡고 숙소를 향해 속도를 내어 걷는다. 숙소에 도착해, 하루 종일 메고 다니던 크로스백과 카메라를 침대에 내던진다. 온몸의 근육이 동시에 비명을 지른다.
“딸냄~ 엄마 어깨 너무 아프다. 와서 좀 두들겨 줘.”
반응이 없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입구에 놓인 소파에 털썩 걸터앉아, 긴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또 핸드폰을 한다. 런던에서 구입한 유심칩이 로마에서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작동이 안 된다. 친구와 카톡도 안 되고, 사진도 못 올리니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간만 나면 핸드폰으로 정보를 뒤진다.
“따~알~램~ 이리 와서 엄마 어깨 좀 두들겨 달라니까.”
“잠깐!”
내 목소리 톤은 이미 높아졌고, 딸내미는 귀찮은 듯 짧게 말을 끊는다. 내 어깨 내가 두들기며, 딸내미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1초, 2초, 3초, 4초 폭발 직전, 마지막 호흡을 거칠게 내몰아 쉰다. 인내는 짧고 분노는 강하다.
“딸냄!”
분노에 찬 내 목소리가 숙소에 쩌렁거린다.
“잠깐만 기다리라니까!”
한 치 물러설 기미 없는 신경질적인 맞대꾸가 흘러나온다. 역시 중2 사춘기 딸내미답게 오늘도 ‘지랄 총량의 법칙’에 필요한 지랄을 잊지 않고 채운다. 내 인내심도 딱 여기까지다.
여행 이후 처음으로 딸내미를 눈앞에 데려다 놓고 호되게 혼냈다.
“너, 지금 한국 가라. 그렇게 친구들과 카톡 하고 싶으면 그냥 먼저 가. 엄마는 너 없이 혼자 여행해도 돼. 기차 두 자리 끊은 거 나 혼자 편히 가고, 숙소 두 명 끊은 거 나 혼자 넓게 쓰면 돼. 네가 이렇게 엄마에게 싸가지 없게 굴 거면 먼저 가. 함께 여행하면 내가 널 보살피기도 하지만 너도 엄마 보살펴줘야 하는 거야. 너만 좋으라고 하는 여행 아니야. 이건 엄마 여행이기도 해.”
딸내미는 서슬 퍼런 엄마의 기세에 눌려 한 마디도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린다. 딸내미의 눈물을 보니 바로 후회가 밀려온다. 딸내미 안쓰럽다고 마음 거리 좁혀보자고 떠나온 여행인데, 엄마 어깨 주물러주러 총알같이 튀어나오지 않았다고, 혼자 한국에 돌아가라 윽박지르고….
여행은 일상의 자아를 잊고 싶어 떠난다 하는데, 엄마 역할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자아가 여행 중에도 염치없이 고개를 쳐든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다락방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까치발을 하고 올라가 본다. 엄마가 후회를 한 바가지 쏟아놓고 혼자 ‘자아’ 타령을 하는 사이, 딸내미는 벌써 쌔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눈물 훔치고 속상해하며 잠들었을 딸내미가 안쓰러워 나도 눈물이 난다. 왜 자꾸 나는 우리 딸내미에게 미안해야 할 일만 만드는지. 몸은 피곤한데 쉽게 잠들 것 같지 않는 로마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