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 펀칭?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다
피렌체에서 1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피사에 도착했다.
맥도날드 화장실에 들어가니, 덩치가 산만한 흑인이 조그만 간이의자에 퍼진 인절미처럼 큰 엉덩이로 앉아있다. 관광지라고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다. 무료로 깨끗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일에 익숙해서인지 생돈 나가는 것처럼 아깝게 생각된다.
스프라이트 병과 누리끼리한 샌드위치 봉투를 들고 들어갔더니, 맥도날드에서 구입할 줄 알고 공짜로 들여보내 준다. 와우~화장실 사용료 1.2유로 아꼈다. 세상에 공짜가 있네. 짠순이 모녀는 공범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는다.
피사의 사탑까지 운영하는 버스를 탔다. 밀고 당기고 부딪치고 흔들리는 만원 버스다. 소매치기당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버스에 ‘소매치기 주의’ 표지까지 붙어있다. 그런 표지를 노골적으로 붙여 놓은 게 신기해서 쳐다본다.
피사의 사탑 정류장에 내렸다. 같은 버스를 탔던 중국인 처자가 열린 핸드백을 살피다 울음을 터뜨린다. 당했다. 진분홍 크로스 백 내 가방도 얼른 살펴본다. 다행히 지퍼에 옷핀까지 그대로 붙어있다.
누구는 여행할 큰돈을 한꺼번에 털리고 울고, 나는 화장실 비용 아꼈다 좋아한다.
상상했던 것보다 많이 기울어져있던 피사의 사탑을 뜨거운 햇볕 아래 구경하고 다시 버스를 타러 나왔다.
기차역에서 피사의 사탑을 왕복하는 버스 1회권은 90분 동안 유효하다. 90분 안에 구경을 마치고 버스를 탑승하면 버스표를 다시 끊을 필요가 없다. 90분이 넘은 것 같긴 한데...... 아마 넘었을 게다. 버스표 파는 담배 가게를 찾는데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내 마음속 작은 악마가 속삭인다.
“뭐, 버스표 파는 가게도 없는데, 그냥 타. 버스 값도 아끼고 좋잖아.”
작은 악마의 속삭임은 작지만 강렬하다. 한 번 속삭이면 다 넘어간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버스를 탄다. 버스표 검사할까 봐 마음이 콩을 볶는다. 3,500원 아끼려다 심장병 걸리겠다. 다행히 버스표 검사는 없었다. 세상에 공짜가 진짜 있나 보다.
피렌체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느긋하게 창밖을 보다 노곤해져 잠이 들려는 순간, 역무원이 다가온다. 기차표 검사다. 당연히 기차표는 있다.
“Ticket, Please!”
지금껏 내 인생에서 내가 내민 종잇조각을 그렇게 오랫동안 진지하게 들여다본 사람은 피렌체 기차 역무원이 처음이다. 기차표를 건네주면 형식상 쓰윽 한 번 들여다보고 돌려주는데…. 이번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역무원은 피렌체 역에 도착할 때까지 30분 넘게, 줄기차게 이탈리아어에 가까운 영어로 설명을 한다. 심지어 제복 안주머니에서 볼펜까지 꺼내 꾹꾹 눌러가며, 기차표 작은 글씨에 밑줄까지 긋는다. 효과적인 의사 전달을 위해 시청각 자료도 활용한다. 기차 벽에 부착된 스크린 화면까지 가리키며,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일을 해도 너무 열심히 한다. 설명이 끝이 없다. 너무 길다는 것만 빼면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이다. 프레젠테이션 주제는 ‘한국인 모녀가 지금 1인당 40유로씩, 80유로 벌금을 내야 하는 이유’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뭐를 내라고?
“이 티켓 7.9 유로에 산거야. 그런데, 뭔 벌금?”
“이 표는 오픈되어있어. 네가 탈 때 펀칭하지 않아서, 이 표를 네가 얼마만큼 썼는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벌금 내야 해.”
펀 펀칭?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다.
‘꼭 펀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금 내야 한다.’
이탈리아 여행 준비하면서 자주 등장한 주의사항이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펀칭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펀칭과 벌금의 상관관계도 이해가 안 되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같은 기차 칸에 탄 미국인들은 큰소리로 떠들고 신나게 놀더니, 어느 순간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몸까지 점점 우리 쪽으로 쭉 빼며 역무원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다. 그들도 역시 펀칭 안 하고 벌금 내야 하는 같은 운명이라는 얘기다.
내려야 할 피렌체 역은 다가오고, 30분 넘게 친절한 설명을 거듭한 역무원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서있다. 말 많던 역무원이 말을 멈추니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80유로, 10만 원이 넘는 벌금을 인내심 너무 많은 역무원에 바쳐야 할 시간이다.
맥도날드 화장실 1.2유로 공짜로 이용하고, 버스 2.6유로 공짜로 타고, 5천 원 아꼈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10만 원 넘는 벌금을 내야 한다니...... 아무래도 같은 버스 탔던 중국인 처자가 소매치기당하고 울고 있을 때, 내 분홍색 크로스백만 움켜쥐고 다행이다 생각한 벌을 받고 있나 보다.
이 상황을 어쩌나 서로 눈치만 본다. 생돈 80유로를 낼 생각을 하니, 입은 바싹 타들어가고 이마에는 생전 안 나던 땀까지 뽀질뽀질 솟는다.
“......”
지금 상황에서는 침묵이 금이다. 딸내미도 입을 꼭 다물고 이 어색한 침묵에 동참한다. 차라리 영어 못하는 체할걸.
기차표를 손에 들고 눈만 껌벅거리던 역무원이 먼저 백기를 든다. 역시 이탈리아인들은 침묵에 약하다. 다른 사람들은 들으면 안 되는 비밀 얘기하듯 자세를 낮추고, 볼륨을 확 줄이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인다. 누가 내 귀에 속삭이려 하면 무섭다. 그래도 잘 들어본다.
“40유로 대신 1인당 5유로만 내.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5유로만 냈다고 자랑하고 다니진 마.”
돈 조금만 내라는 말은 조그맣게 속삭여도 다 잘 들린다. 80유로 벌금 안내는 게 어디냐 싶어, 딸내미 동전 지갑에서 10유로를 역무원 손바닥에 털어주고 얼른 기차에서 내렸다. 그 10유로가 이탈리아 국고에 안전하게 들어갈 확률은 희미해 보이지만.
내려서 역으로 걸어가는데, 같은 기차 칸에 탔던 미국인 관광객들이 씩씩대며 난리 블루스 방정을 떤다.
“우리 모두 5유로씩 벌금 냈어. 세상에~ 기차 내리기 1분 전에 모두 벌금 내라고 하다니. Disgusting!”
‘Disgusting이라고? 철없는 미국 관광객들이네. 30분 내내 설명 듣고, 깨알 같은 글씨 역무원과 같이 들여다보고, 시청각 교재 공부까지 하면서 프레젠테이션 경청하고, 어색한 침묵 견딘 사람은 우리야. 우리에게 5유로 받으니까 너희들에게도 할 수 없이 5유로 받은 거야.’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참았다. 적절하게 생색 낼만큼 유창한 영어 실력은 아니므로.
한인민박 아주머니에게 오늘 벌금 낸 사연을 얘기하니 이렇게 설명해 주신다.
“매번 검사를 하지는 않는데, 한 번 걸리면 벌금이 커. 표에 날짜가 지정되어 있으면 펀칭 필요 없는데, 오픈되어있으면 무조건 펀칭해야 해. 기계 고장이면 탑승 시간을 볼펜으로 자기가 써넣어야 하고.”
맥도날드 화장실 돈 안 내고 썼다고 흐뭇해하고, 버스도 공짜로 탔다고 내심 뿌듯했더니, 결국 이탈리아 역무원 손에 벌금 10유로 털어놓았다. 세상에 공짜도 있네 하고 넘겨짚은 벌금이다.
세상에 공짜는 진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