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삶이 리셋되는 순간

다른 세상, 베네치아

by 글쓰는공여사

피렌체에서 트랜이탈리아 기차를 타고 바다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엄마! 난 베네치아가 제일 기대돼.”

“왜? 이유가 있어?”

“응. 특이하잖아.”


맞다. 딸내미의 말처럼 베네치아는 특이하다. 육지에서 떨어져 나온 섬이 아니라, 수백만 개의 인공 말뚝을 바다에 세워 인간이 만든 도시다. 118개의 섬이 400여 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고, 대운하가 S자로 도심을 가로지른다. 작은 운하가 그 사이사이를 촘촘하게 연결하며, 그 운하를 따라 곤돌라와 수상버스 바포레토가 쉬지 않고 팔딱이며 펌프질 하는 심장처럼,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토해내기를 반복한다.


베네치아 본섬에서 버스로 20분 떨어진 호텔에 짐을 풀었다. 본섬에 숙소를 잡을까 생각도 했지만, 호텔 숙박비가 본섬보다 싸고 다음 여행지인 스위스로 떠나는 기차역이 가까웠다. 무엇보다 그동안 민박과 에어비앤비에 머물며 적응하느라 쌓인 피로도 호텔에서 쉬면서 털어내고 싶었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처음 들어설 때도 그렇고, 다음날 외출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 김영하-


카드키를 꽂고 객실 문을 열면 우리는 항상 그 객실의 첫 투숙객이 된다. 필요한 비품이 정해진 자리에 정갈하게 놓여있고, 사각거리는 푹신한 침구와 상쾌한 실내 온도와 아침 뷔페가 준비되어 있는 곳. 선택의 피로가 몰리고 오감이 쉬고 싶을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 바깥공기가 차단된 진공의 세상, 호텔에서 짐을 푼다. 잠깐이라도 삶이 리셋되는 순간에 숨을 크게 몰아쉬고, 다시 변화를 맞으러 나갈 용기를 긁어 모아 본다.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를 만나러 간다. 창문으로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물 냄새가 실려 온다. 너울너울 울렁거리는 바닷물 위에서 사람들은 잘도 걸어 다니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리알토 다리에서 일몰을 지켜본다. 따스한 주황색 햇살이 운하와 그 위를 떠다니는 곤돌라와 고풍스러운 건물을 비춘다. 햇살은 서서히 색감을 바꾸고, 어둠과 섞인다. 베네치아는 어둠에 잠긴다. 물 위에 어른거리는 전구 불빛이, 사람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흥겨운 음악이, 비릿한 바다내음이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보낸다.

_7313339.JPG 일몰의 베네치아

베네치아 골목 탐험에 나선다. 화려한 가면을 구경할 때, 종이컵에 담긴 스파게티를 다리 위에 걸터앉아 먹을 때, 딸내미가 가지고 싶어 하던 봉인 인장을 마침내 살 때, 우리는 지금 여기 베네치아에서 있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지도 않으며, 온전히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여행이 주는 특권을 오롯이 누린다.


골목 어디선가 바이올린 선율이 들린다. 가게에서 틀어놓은 음악이려니 생각했는데,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선명하다. 골목 귀퉁이에 청년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파란 티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에, 금발의 미남이다.


“우리 베네치아 왔다고 뭐 이런 이벤트까지 준비했냐?”

흥에 겨워 너스레를 떨다 금방 연주에 빠져든다. 애절하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연주에 정신이 또 가출을 한다.


바이올린 선율만 남고 다른 존재는 모두 사라진다. 내 옆에 꼭 붙어있는 열세 살 딸내미도 사라지고, 브라보를 외치는 여행객들도 사라진다. 살랑거리는 축축한 바다 바람도, 어스름한 저녁 가로등 불빛도, 과거에 대한 자책도, 나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사라진다.


오직 바이올린 소리만이 바다 한복판에 신비하게 떠있는 베네치아 섬을 감싼다. 나 홀로 섬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주어 담아 내 귀에 쏟아붓는다.

바로 그 길거리 연주자입니다

“엄마!”

계속될 것만 같던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고 딸내미가 나의 어깨를 잡아끈다.


가출했던 정신은 민망함에 언제 그랬냐 싶게 시치미를 뗀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내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고, 골목의 불빛이 내 눈을 다시 부시게 만들고, 베네치아 섬에 다시 바람이 분다. 잠깐 동안 난 많이 행복했나 보다. 딸내미가 수줍게 바이올린 케이스에 2유로를 담아주고 온다.


호텔 가는 버스를 타려고 수상버스 바포레토에 오른다. 수상버스가 어두운 물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간다.

“다른 세상 같다. 딸냄. 그지?”


돌아다본 딸내미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베네치아 골목 어느 가게에서 구입한 봉인 인장을 손에 꼭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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