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무라노 부라노섬,
우웩 퉷퉷

이탈리아에는 사람들이 산다

by 글쓰는공여사

베네치아의 섬 무라노, 부라노를 가는 날이다. 이름이 정감 있어 자꾸 불러본다. 무라노, 부라노.


유리공예로 유명한 무라노는 수상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베네치아 주변에서 가장 큰 섬이다. 화덕에서 피자를 구워내듯 유리로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장인의 솜씨에 잠깐 신기해하고, 마음은 온통 작고 귀엽고 앙증맞은 유리 미니어처에 빼앗긴다. 주머니에 한 줌 가득 담아와 주위 사람들에게 선심 쓰듯 하나씩 나눠주고 싶다.


파도가 넘실대는 듯한 거대한 샹들리에도 눈길이 머문다. 수정구슬 들여다보듯 보고 있으려니 일렁거리는 유리 속 파란 물결이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혼미한 정신에 신용카드 딱 꺼내고 배송 주소 쓰고 있을까 봐 가게를 얼른 빠져나온다.


그런데 그걸 내 방 천장에 매달아 놓으면 좀 부담스럽겠지? 아니야. 매일 다른 세상 놀러 온 듯 좋을지도 모르지. 상상은 경계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고 단점이다. 수상버스 바포레토가 우리를 다음 목적지인 부라노로 데려다준다.

_7303214.JPG 무라노 섬 유리 공예 가게에서

배가 정박해 있는 좁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쭉 늘어서 있는 노란 벽에 파란 창문, 보라 벽에 녹색 창문, 진분홍 핑크 벽에 연분홍 창문의 단층집들. 현실 속에서 이렇게 원색의 화려한 색감의 집들을 대하니 놀이공원 놀러 온 아이처럼 마음이 들뜬다.


“Color is like Music. It uses shorter way to come to our sense to awake our emotions.”

색은 음악과 같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깨우기 위해 우리의 감각으로 오는 더 빠른 길을 사용한다.

_7303232.JPG 여기에 그렇게 멋진 글이 붙어 있다

고기잡이배가 안갯속에서 자기 집을 쉽게 찾으려고, 집을 원색으로 칠하게 되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부라노 섬. 관광객이 수시로 드나드는 부라노 섬에도 주민들은 오늘의 일상을 산다. 바람에 실려 오는 짠 내를 머금은 빨래를 물에 헹궈 탁탁 털어 햇볕에 넌다.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고, 목이 긴 대빗자루로 넘실대는 운하의 물을 바다로 쓸어 돌려보낸다.


“딸냄, 우리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 집, 순서대로 찾아 인증샷 찍을까?”

“좋아. 재밌겠다. 엄마 우리 빨간 집부터 찾아보자.”

엄마의 갑작스러운 놀이 제안에 딸내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돈다.



딸내미는 세 살 무렵이었고, 난 늦은 출산에 체력 딸리는 육아에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던 때였다.

잠깐 내가 눈을 붙인 사이, 딸내미는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가 하던 가위질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게 왜 안 잘리지? 엄마는 요것을 이렇게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달그닥거리니까 색종이가 사싹 잘라지던데. 이렇게... 이렇게....’


딸내미는 아마 혼자 깊게 고민하며 가위와 색종이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을 게다. 짧은 시간이었다. 잠에서 깨어 딸내미를 눈으로 찾았을 때, 딸내미는 나를 향해 환한 웃음을 날렸다. 한 손에는 가위를, 다른 손에는 잘린 색종이를 들고, 양손은 피범벅이 된 채로.


딸내미는 자기 손 찌르고 베어가며 짧은 시간에 배운 가위질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난 딸내미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약을 발라주며 속이 많이 상했다. 피곤하다고 그 조그만 손이 피범벅이 되는 것도 모르고 잠을 잔 미안함에.


그렇게 자기 손을 자르고 피를 묻혀가며 색종이를 잘랐던 아이가, 지금은 베네치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손가락으로 무지개 색 번호를 표시하며 환하게 웃는다. 그런 모습을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들여다보니 참 이쁘다.


부라노 섬의 먹거리가 비싸고 맛도 없다는 후기에 샌드위치를 사 가지고 들어왔다. 햄과 치즈, 토마토와 녹색채소가 터질 듯 빵 사이에 박혀있는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구경하러 돌아다녔으니 배가 고프다. 따스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부라노 섬에서 점심을 먹는다.


“어서 먹어. 딸냄! 배고프겠다.”

“맛있겠다.”

딸내미가 커다란 샌드위치를 건네받아, 입 안 가득 한 입 베어 문다. 그런데 표정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우웩~ 엄마, 이 샌드위치 왜 이렇게 짜?”


딸내미에게 건네받아한 입 베어 무니, 염전의 소금 한 바가지를 입 안에 탁 털어 넣고 씹는 맛이다. 바르셀로나 먹물 빠에야에 이은 두 번째 소금의 공격이다. 아직도 덜 아문 상처에 왕소금을 또 뿌린다. 미친다. 해결하지 못한 ‘유럽의 왕소금 저주’다. 딸내미는 생수 한 통을 다 비우고, 나는 아깝긴 하지만 쓰레기통에 샌드위치를 고스란히 버린다.


“오렌지라도 먹어! 딸냄.”

배고픈 딸내미에게 왕소금 샌드위치를 먹인 미안함에 오렌지를 까서 건넨다.


“퉷퉷~엄마, 이 오렌지는 또 왜 이렇게 써? 이거 오렌지 맞아?”

“오렌지 맞겠지......”

소심하게 말 뒤끝을 흐리며, 오렌지라는 놈의 속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불그죽죽한 게 이건 오렌지가 아니다. 자몽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몽이 이렇게 백 퍼센트 쓰기도 힘든데.


연달아 짠맛, 쓴맛 다 보고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달려갔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입안을 진정시키고, 부라노 섬을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여행은 생각도 못하는 ‘뜻밖의 사건’으로 채워진다. 그게 여행의 묘미다 라고 하기엔 퍽하고 얻어맞은 뒤통수의 충격이 너무 커서 문제지만. 여행에 돌아와서도 ‘뒤통수치는 사건’이 기억에 더 남는다. 우리에게 부라노 섬은 빨주노초파남보 예쁜 집보다 ‘우웩, 퉷퉷’가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_7303320.JPG 이렇게 멋진 곳이 우웩과 퉷퉷으로 기억되다니......

베네치아 본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굶주린 늑대가 되어, 어느 골목 레스토랑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의 재물이 되었다. 후기고 뭐고 찾아볼 기운도 없다. 테이블이 서너 개 밖에 없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웨이터가 우리에게 내민 메뉴판은 코팅이 들뜬 종이에 사진마저 볼품없이 찍혀있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이번에도 음식 테러당하면 미각 회복하기 힘들 텐데. 아무 정보도 없이 이건 도박이다. 제발 짜지만 않게, 제발 쓰지만 않게, 먹을 수 있게만 해다오.’


그런 바람으로 가장 실패가 적을 것 같은 토마토 스파게티와 리조또를 주문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꽉 차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호객 행위로 어깨 잡아 끌려온 손님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아무 기대 없이 배만 채우게 해달라고 빌었던 스파게티와 리조또는 아주 맛있었다. 미식가 딸내미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맛있는 스파게티였다고 꼽을 만큼. 그런데 누구에게 추천하고 싶어도 레스토랑 이름도 위치도 모른다. 허기져 들어갔다 맛있게 먹고 나온 기억밖에.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도, 자몽도 우리를 배신하고, 정작 배신을 걱정하고 준비했던 스파게티와 리조또는 예상을 벗어난 맛있는 맛으로 우리를 또 배신한다.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배신’들을 겪으며 우리는 삶의 유연성을 조금 늘린다. 그게 우리가 굳이 예상 가능하고 편한 일상을 내던지고, 우연과 혼돈 속으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써가며 여행하는 이유가 아닐까?


호텔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딸내미가 말했다.


"엄마, 우리 반 친구들이 나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네. 그래서 베네치아라고 대답했더니, 자기네들도 지금 베네치아에 있대”

“뭐? 베네치아에 있다고?”

“응. 오늘 우리 반 친구들, 단체로 베네치아에 뷔페 먹으러 갔대.”

“.......”


로마와 폼페이, 피렌체, 베네치아를 돌아보고 내일 이탈리아를 떠난다.


버스 먼저 올라타겠다고 서고 있던 줄 다 무시하고,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새치기도 하는 곳, 박물관에서 노포토노포토를 목이 터져라 직원들이 외쳐대도 플래시 불빛이 끊이지 않는 곳, 염전만큼 짠 샌드위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곳, 커다란 티본스테이크의 맛에 감동하는 곳, 나라 전체에 유적만큼이나 소매치기도 깔려있는 곳, 손해도 보고 소매치기도 당하고, 치고 박고 울고불고 먹고 마시고, 소리 고래고래 지르다 뒤늦게 지쳐서 잠이 드는 곳.


이탈리아에는 사람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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