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라켄] 드디어 당하는구나
캐리어 절도

보는 것마다 자꾸 부러우니

by 글쓰는공여사

이탈리아에서 스위스 인터라켄으로 국경을 넘어가는 날이다. 트랜이탈리아 티켓을 실수로 두 번 구입하고, 눈물의 메일로 기어코 환불을 받 아냈던 바로 그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간다.


기차역에 여유 있게 나갔는데 제시간에 기차가 도착하질 않는다. 무슨 이유로 늦는지, 얼마나 늦는지 안내 방송도 없이 그냥 연착이다. 이탈리아답다. 분 단위로 출발과 도착 시간을 공유하는 우리나라 시스템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생각지도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 변화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기르기엔, 이탈리아만 한 나라가 없다.


기차가 너무 늦으면 밀라노에서 환승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본다. 기차는 예정보다 15분 늦게 도착했다.


20킬로그램 캐리어를 기차에 실으려고 끙끙댄다. 역시 나에겐 버거운 무게다. 캐리어를 기차 계단에 어정쩡하게 걸쳐 놓고, 올리지도 다시 내리지도 못한다. 지금 기차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난감하다.


그런데 기차 칸에서 느닷없이 호리호리한 금발 청년이 짠하고 나타나더니,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올려준다.

‘땡큐 소우 머치.’라고 말할 틈도 없이, 금발 청년은 무서운 속도로 캐리어를 들고 기차 칸을 옮겨간다.


‘이게 뭔 일이지? 드디어 말로만 듣던 캐리어 절도를 당하는구나. 친절을 베푸는 척하다가, 통째로 들고튀었다는데... 생긴 건 멀쩡한데. 기차 기둥에 캐리어 묶는 자물쇠도 다이소에서 사왔는데, 묶어보지도 못하고 눈앞에서 당하는구나.’

photo-1568149134987-b0432f996246.jpg 이만큼 불안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눈은 캐리어에 꽂아두고, 발은 좁은 좌석들 사이를 헤치며 청년의 뒤를 부지런히 쫓는다. 여차하면 뒷덜미라도 잡아야 하는데, 청년의 발걸음은 너무 빠르다.


그런데 청년이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춘다. 그러더니 캐리어를 가볍게 들어 선반에 털썩 올려놓고 사라진다.

10A, 10B. 정확히 우리 기차 좌석번호다.


엉킨 머릿속 실타래를 풀어 본 결과는 이렇다. 캐리어를 못 올리고 있는 나를 보고 먼저 기차에 타고 있던 청년이 와서 도와주고, 내 손에 들고 있던 티켓을 흘끔 보고 캐리어를 우리 좌석까지 옮겨준 것이다.


그런 청년을 ‘캐리어 절도범’으로 몰다니, 내가 미친다. 아무리 여행하면서 긴장과 불안으로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하더라도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을 이제 절도범으로까지 몰다니......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그 금발 청년은 한마디 말도 없이 과묵하고 독립적이고 책임감까지 강하냐고?


불안은 새로운 상황을 경험해야 하거나, 상황에 대한 결과를 겪어낼 마음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생긴다. 내 것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중 삼중 철통 방어벽을 쳤다. 캐리어 잠금 열쇠는 기본이고, 기차 기둥에 묶을 자물쇠까지 따로 준비했다. 들고 다니는 크로스백에는 지퍼에 옷핀까지 채우고 다녔고, 현금은 청바지 안쪽에 따로 바느질해서 만든 비밀 주머니 속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래도 캐리어를 잃어버린 경험은 없고, 그런 경험에 대한 마음 준비도 되어있지 않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불안하기만 했다.


캐리어가 좌석 선반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나니, 그제야 딸내미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딸내미는 자기 캐리어를 혼자 기차에 올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기차 칸을 넘어가는 엄마 쫓아오느라 얼굴이 시뻘겋다.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낯선 변화의 연속이다.


기차가 이탈리아를 벗어나 스위스로 넘어가니 풍경이 순식간에 변한다. 산기슭에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요들송을 부르며 염소들 사이를 돌아다닐 것 같다.


스위스 국경 마을인 도모도쏠라를 지나 슈피츠에 도착했다. 스위스에서 딸내미 모든 교통비는 무료다. 8일 패스, 패밀리 카드를 발급받아서다. 스위스 패스에 도장을 받고 유람선을 타러 간다.

“엄마. 캐리어 안 밀어도 쑹쑹 잘 내려간다. 야호~ 신난다.”


내리막길이라 캐리어를 먼저 밀어 두고 비명을 지르며 그 뒤를 쫓아간다. 그동안 무거운 캐리어 끌며 지쳤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시간이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조용하다. 함께 기차에서 내렸던 혈기왕성한 배낭족들은 이미 유람선을 타고 떠나고 없다. 그들의 일정은 빡빡하고 발걸음은 가볍고 기운은 넘친다. 출발은 같아도 나중에 둘러보면 주위엔 우리만 남아있다. 2시 35분 유람선은 이미 떠났고 다음 유람선을 기다린다. 두 시간 여유가 있다.

20140731_160830.jpg 유람선을 기다리는 선착장에서

7월 마지막 날의 햇살은 조금은 뜨겁고, 간들거리며 불어오는 강바람은 시원하다. 딸내미는 선착장 아이스크림 가게를 혼자 불쑥 들어가, 봉긋 솟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나온다. 여행 22일 차, 딸내미도 이제 혼자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먹을 만큼 여행에 익숙해졌다.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한 입 권하는 딸내미의 입과 눈에 함박웃음이 피어난다.


선착장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온다. 옆에 앉아있는 커다란 그레이트데인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지, 자꾸 할머니에게 눈길을 보낸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나눠먹을 마음은 없었던지 눈길을 피해 먼 산을 바라본다. 꼭 해야 할 일도, 바삐 서둘러 가야 할 곳도 없어 보이는 노부부는 그 시간 속에 평온하게 존재한다.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누린다.


나도 그리 늙고 싶다. 딸내미 커서 집 떠나면, 남편과 키우는 개 한 마리 데리고 어슬렁거리며 동네 산책을 나오고 싶다.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살랑거리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 속에 있고 싶다.

20140731_153717.jpg 선착장의 노부부

유람선을 탔다. 연한 청록색 강물은 햇살에 부딪혀 번쩍번쩍 빛을 되쏘아 보내고, 산기슭에는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노란색 호텔에는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비치파라솔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숲에 누워 햇살도 즐긴다. 잔잔한 강물 위에서 아이들은 수영도 하고 배를 타고 논다.


‘아~ 사람들이 이렇게도 사는구나!’


무엇을 보러 다니지 않아도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햇살 아래 누워있고 얘기하고 장난치며 보내는 그들의 평온한 휴식이 부러웠다.


보는 것마다 자꾸 부러우니 내가 스위스에 도착한 게 분명하다.


내 마음의 문을 꽉 조이고 있던 긴장의 빗장이 절컥 벗겨지는 소리가 나에게도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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