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라켄] 기침은 분명
아니고 그럼 사랑인가?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

by 글쓰는공여사

육점이네는 스위스에서 우연히 만난 30대 초반의 남녀 커플이다. 자기네 스스로를 ‘소고기’, ‘돼지고기’라는 다소 직설적인 별명으로 부르니 우리도 그들을 정육점 팀, ‘육점이네’라 불렀다.


‘돼지고기’ 총각은 워낙 붙임성이 좋고 낙천적이라 유머를 쓸어 담을 만큼 쏟아냈다. ‘소고기’ 처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싹싹하게 주위 사람을 잘 챙겼다.


융프라우요흐 올라가는 열차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돼지고기 총각은 앞좌석에 울고 있던 스위스 꼬마를 어르고 달래고 있었다. 꼬마가 금방 울음을 그치고 헤헤거렸다. 그 재주가 신기해 유심히 봤는데, 정상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내려오는 기차도 우연히 함께 탔다.


육점이네와 있으면 뭘 해도 재밌었다. 웃어도 더 웃기고, 뭘 먹어도 더 맛있었다. 딸내미는 언니 오빠가 살뜰하게 챙겨주니, 표정이 한결 밝아지고 기운이 넘쳤다. 딸내미의 그런 모습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다음날 2990m 만년설 쉴트호른에도 함께 올랐다. 360도 회전 레스토랑에서 비싼 식사는 못 했지만, 마트에서 사 온 빵과 샐러드, 음료를 식탁에 펼쳐놓고 소박한 점심을 먹었다. 커피만 주문하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니 주인 눈치가 보인다. 후다닥 점심을 먹어치우고 민망함에 서로 쳐다보며 웃는다.


우리가 간 날은 짙은 안개 천국이었다. 만년설 덮인 산봉우리 배경도 없이 안갯속에 서서 사진을 찍자니 그게 또 우스워 웃는다. 아무래도 육점이네가 웃음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나 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웃음이 실실 삐져나오는 걸 보니.


쉴트호른은 영화 ‘007 여왕폐하 대작전’의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관람객의 얼굴을 컴퓨터 화면 속에 맞추고 영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면, 관람객이 007 영화의 주인공이 된 동영상을 플레이해주는 체험 공간이 있었다.


개그맨 뺨치는 ‘돼지고기’가 제트스키를 타고 총을 쏘며 적을 추적하는 과장된 연기에, 우리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쓰러졌다. 옆에서 흘끔거리며 구경하던 외국인들은 줄까지 서가며 차례로 체험을 했다. 물론 그들은 우리만큼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우리의 즐거움은 체험에서 온 게 아니라, 육점이네와 함께 있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이었으니까.


뮈렌에서 김메발트까지 한적한 시골 마을을 걸었다. 집집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정원에는 일곱 난쟁이와 백설 공주도 살고 부엉이와 공작새, 코 큰 흰 돼지도 사이좋게 산다. 땔감을 벽면 가득 빼곡히 쌓아둔 집도, 줄줄이 소 방울을 장식한 집도 보인다. 시골이지만 경제적 여유가 느껴진다.


_8023612.jpg 바로 이 집이다 땔감 쌓아놓은 집

내리막길이라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계속되더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성기게 후드득 떨어진다. ‘소고기’ 처자는 딸내미에게 비닐 비옷을 꺼내 입혀준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니 마음 써주는 육점이네가 고맙기만 하다.


비가 지나가고 무지개가 떴다.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어슬렁어슬렁 몸집 큰 줄무늬 고양이가 등장한다. 마을을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붙임성을 무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길고양이가 분명하다.


샌드위치 속에 든 햄을 몽땅 얻어먹고, 길바닥에 고인 물로 목을 축이더니 털썩 아스팔트 위에 드러눕는다. 햇볕 쬐는 시간인가 보다. 딸내미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손길이 만족스러운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감았다 하며 졸고 있다. 근심 걱정 불안 하나 없는 행복한 놈이다. 선착장에서 아이스크림 물고 산책 나온 스위스 노부부가 부럽더니, 이제 스위스 길고양이도 부럽다.

_8023615.jpg 요놈이다. 스위스 길고양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인터라켄에 도착해, 숙소로 가는 102번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햇빛이 비추고 비가 오고 무지개까지 젖은 도로 위에 뜬다.


우리 네 명은 달랑 하나 있는 작은 우산 속에 간신히 머리만 집어넣고, 몸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는다. 비좁은 우산 속에 눈코입 붙은 네 개의 얼굴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내리는 비 좀 피해보겠다고 쌕쌕거리는 숨결도 느낄 만큼 가깝게 그러고 있는 게 우스워 우리는 또 깔깔댄다. 자꾸 주체할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던데, 기침은 분명 아니고 그럼 사랑인가?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는 스위스 시내버스는 이제 칼날이 무뎌졌는지 도착시간이 넘어도 나타나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뛰어.”


네 사람의 머리가 순식간에 우산 속을 벗어나 빗속을 질주한다. 숙소 로비에 한 명씩 헥헥거리며 도착한다. 우리는 육점이네와 먹으려고 모아두었던 숙소 토큰을 자판기에 넣고, 뜨거운 핫 초코를 뽑아 마신다. 젖은 옷을 말리며 육점이네와 보내는 이 시간이 핫 초코만큼 따뜻하고 달달하다.


딸내미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입학식을 강당에서 했는지, 담임이 젊은 분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진처럼 뚜렷이 기억나는 한 장면. 딸내미는 조금 품이 큰 빨간 바바리코트를 어색하게 걸쳐 입고, 교실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교실 밖 복도에 서서 딸내미를 지켜보며, 이제 엄마 품을 떠나는구나 하는 섭섭함보다 아무 문제없이 학교생활을 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을 했다. 정신없이 바쁜 엄마에게 신경 쓸 일은 안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이고 부족한 엄마였다.


딸내미는 1, 2학년 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기억나는 유일한 친구는 몸집은 왜소하고, 함께 살지 못하는 엄마를 그리워하고, 도벽까지 있어 반에서 겉도는 아이였다.


‘너는 우리 팀에는 못 들어와.’ 경고성 짙은 꼬깃꼬깃한 메모를 필통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딸내미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을 만큼 키 크고 덩치 좋은 아이에게 받은 쪽지였다. 그 아이가 괘씸하고 미웠다. 내 딸내미가 말로만 듣던 왕따인가 보다 속상한 마음에 잠까지 설쳐가며, 쪽지 들고 담임을 찾아가야 하나 밤새 고민했다.


딸내미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왜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친구를 못 사귀나, 내 마음 쓰이게 하는 딸내미를 보는 것이 속상하기만 했다.

딸내미 1학년 때 바닷가에서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고 어울려 다녔다. 중학생이 되자, 학교생활은 ‘성적’보다는 ‘친구’라는 나름의 깨달음으로 친구들과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도 늦은 오후 집에 들어와, 텅 빈 집에서 차려진 저녁을 혼자 먹을 때는 딸내미는 슬프고 외롭고 무서웠을 거라는 생각을 한참 지낸 뒤에 했다.


여행하면서 멋진 풍경에 눈이 번쩍 뜨이고, 맛있는 음식에 미각이 살아나는 즐거움도 크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에 비할 바 아니다.


우연히 같은 여행지에 약속 없이 만나 깔깔대고 웃으며 시간을 함께 보내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작별인사를 미적거리고, 여행 후에도 어떻게 지내나 가끔 소식이 궁금해지는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 런던에서 만난 ‘미정 씨’도, 스위스에서 만난 ‘육점이네’도 우리에겐 그런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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