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여기서 돌아야 해
알프스 융프라우를 보기 위해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해발 3,454미터 전망대에 오른다.
한여름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추위라 하니, 캐리어에 있는 옷을 몽땅 털어 껴입고, 스카프까지 두르며 부산을 떤다. 딸내미도 취급주의 택배를 포장하듯, 돌돌돌 겹겹이 싸고 또 싸맨다.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다 갑자기 몸에 둘러진 옷이 답답한지 딸내미는 둘러놓으면 안 입는다 벗어던지고, 또 둘러놓으면 벗어던진다. 올라가면 엄청 춥다니까. 딸냄!
융프라우 전망대의 짙은 안개는 눈 덮인 만년설 봉우리를 잠깐 보여주었다 감췄다 우리를 감질나게 했다. 만년설 봉우리가 보이면 사람들이 떼로 몰려나가 사진을 찍었다가, 안개가 몰려오면 전망대 안으로 추위를 피해 몰려들었다.
전망대 한쪽 벽면에는 우리나라 컵라면 빨간 용기가 탑처럼 쌓여있었다. 산악기차 왕복 티켓을 구입하면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신라면이다. 우리나라에선 흔하디 흔한 컵라면을 알프스 정상에서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니, 컵라면 한 놈 한 놈이 반갑고 정겹다. 컵라면을 서빙하는 외국 청년이 기 막히게 적당한 물을 또르르 용기에 따라 건네주고 또 건네준다.
알프스 정상까지 라면으로 점령한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 ‘대한민국 딴딴 딴 딴따!’가 절로 튀어나오려 한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기막힌 마케팅이다. 추위와 고산병을 가라앉히는 데 뜨겁고 매운 컵라면만 한 게 없다.
딸내미는 컵라면을 엎지를 새라 소중히 받아 들고 혼자 성스러운 의식을 치른다. 만년설이 보이는 전망대 창가에 앉아, 컵라면과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찍고, 라면발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올려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흘릴 새라 조심스레 털어 마시고, 입가에는 만족감을 가득 묻히고 말한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을 먹다니...... 엄마! 맛이 최고다.”
여행이 길어지면 대부분 그 나라 음식에 잘 적응하지만, 한국음식이 딱 필요한 때가 온다. 몸이 아프고 힘들 때다. 한국음식이 없어도 몸을 회복하긴 하겠지만, 몸은 뭔가 2퍼센트 부족한 상태로 여행을 계속하게 된다. 아플 때는 평소에 먹어 인이 밴 음식을 넣어줘야 몸도 마음도 안정이 되고, 여행을 계속할 에너지를 얻는다. 고산병을 가라앉혀주는 매콤한 융프라우 컵라면이 그랬고, 로마에서 아팠을 때 혼자 끓여먹은 된장국이 그랬다.
35박 여행 일정을 런던에서 시작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잡고, 적당한 체류 날짜를 분배했을 뿐인데, 마치 불꽃놀이를 보러 날짜를 맞추고, 숙소를 정한 것처럼 우리는 우연히 그날 거기에 있었다. 스위스 건국기념일 8월 1일, 인터라켄 드넓은 잔디밭.
호텔 앞 광장에는 건국기념일 축하 공연을 준비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 시니어 오케스트라다. 흰색 와이셔츠와 블라우스, 까만 바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플루트, 클라리넷, 호른 등 악기를 조율하느라 삑삑 소리를 낸다.
날이 어둑해지자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불’을 가지고 ‘꽃’을 만들며 노는 ‘놀이’, 인간들의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불로 음식을 익히고, 다른 침입자를 위협하고, 대지를 태우며 다른 종을 지배해 온 호모 사피엔스가, 이제 불꽃으로 하늘을 태우며 논다. 별을 품고 꼬리를 끌며 하늘을 오르다, 점화 선에 불이 붙으면, 천둥 같은 격렬한 소리를 내며 품고 있던 별을 하늘에 쏟아 놓는다.
주민들 뿐 아니라 관광객들까지 합세해, 쏘아 올라가는 불꽃마다 환호를 한다. 축제가 절정에 이르자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하나씩 목소리가 합쳐지더니 거대한 함성의 노래가 울러 퍼진다. 스위스 국가다. 뭉클한 표정으로 손까지 휘저어가며 부르는 그들의 애국가에 파묻혀 있자니 어색하다. 내가 외국인이구나 여기서는.
목청 돋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대던 할머니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옆에 서 있던 나에게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이 불꽃에 쓰이는 화약 제조 공장이 여기서 20~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 매년 거기서 재료를 직접 공수해서 이런 멋진 불꽃놀이를 만들어 보여주는 거야.”
“Oh!”
할머니가 뭐라 하던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터질 때마다 딸내미와 나는 서로의 어깨를 얼싸안고 소리를 질렀다. 오케스트라의 힘찬 연주가 어두운 하늘 위로 축제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지금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여행한다. 눈앞에 터지는 밤하늘의 불꽃만 보이고, 함께 내지르는 함성 소리만 귀에 꽂히고, 꼭 잡은 딸내미의 따뜻한 손의 감촉만이 느껴진다.
스위스에서 우연히 받은 마법의 선물, 불꽃놀이가 나에겐 인생의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바로 지금, 여기서 돌아야 해. 너의 삶에 엄마 고픈 딸내미와 함께 할 시간도, 숨 쉴 여유도 보태면서 살아야 해.
지금도 절정으로 치닫던 그 날의 불꽃놀이 영상을 보면 가슴이 뛴다. 가슴이 뛴다는 것은, 살아온 인생보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더 벅찬 기대가 있다는 얘기다.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