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영어로
길길이 미쳐 날뛰어보기

아프니까 여행이 부담이다

by 글쓰는공여사

저가항공 부엘링을 타고 이탈리아 로마로 날아가는 날이다. 시체스 비치에서부터 몸살 기운이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자고 새벽에 일어나 주섬주섬 로마 갈 짐을 챙겼다. 여행 떠나기 전날까지 일하고 시차 바뀐 상태로 런던을 헤매고, 바르셀로나에서 더위와 싸우면서 몸이 힘들었나 보다.


공항 의자에 앉아서도 자고 비행기 안에서도 잤다. 몸이 아프니 무섭지도 않다. 몸이 천근만근 무너져 내린다. 아~~~ 아프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딸내미 데리고 캐리어 두 개도 무사히 끌고 로마 숙소에 도착해야 하는데...... 여행 13일째, 아프니까 여행이 부담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후덥지근하고 시크무레한 냄새가 떠돈다. 캐리어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성질 무지 급한 나라, 코리아에서 왔다. 88km 컨베이어 벨트를 공항 지하에 깔고, 100m를 14초에 주파하는 초고속 수하물 이동 시스템을 가진.


입국 수속 끝나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면 우리나라 공항처럼 ‘아! 저기 우리 짐!’ 그럴 줄 알았다. 기다려도 안 나온다. 심지어 여러 항공사 짐이 한 벨트 안에 섞여 나온다. 입술은 바싹바싹 마르고 천근이나 되는 몸은 자꾸 의자 밑으로 가라앉는다.


딸내미가 벨트 앞을 서성이다 초조한 목소리로 묻는다.

“엄마, 왜 이리 안 나오지?”

“글쎄...”

“잃어버린 거 아냐?”

“설마...”

“딴 나라 가 있으면 어쩌지?”

“그럴 리가...”


50분이 지났다. 30분 지나도 짐을 못 찾으면 분실이라는데. 다른 날이라면 머리에 핏대 세우고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제발 오늘은 안 된다. 해결할 에너지가 없다. 아침에 밍밍한 산양유에 콘플레이크 말아먹고, 3시 넘는 지금까지 음식 구경도 못했다. 컨베이어 벨트 째려보다 빠진 눈알 주어 담기 직전, 우리 캐리어가 힘겹게 벨트를 타고 나타난다. 반갑다. 씨팔이~트웬티~(18kg, 20kg)



숙소 근처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트레비젼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던지 맨 앞줄이다. 계속 기다린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우리 뒤에 긴 줄을 만든다. 드디어 버스가 왔다. 타기만 하면 숙소에 갈 수 있다.


그런데 버스가 들어오자마자 줄 서있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마구잡이로 몰려들고 우린 졸지에 뒤로 밀린다. 런던에서도 바르셀로나에서도 본 적이 없는 장면이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버스 줄 무시하고 밀치고 새치기해서 무조건 올라탈 것.


현금으로 이용 가능하다는 후기만 믿었는데, 버스 차장이 현금 안 받는다 표 끊어오라 손사래를 친다. 오 마이 갓. 비명이 절로 나온다. 몸은 아프지 배는 고프지 현금은 안 된다 하지, 이제 표 끊어오면 버스는 언제 탈 수 있는 건지? 이성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지금 허물어진다. 사람들을 모두 태우고 버스는 떠나고 우리만 휑하니 남았다. 로마가 미워진다.

_7222138.JPG 임마누엘 2세 전망대에 올라가 본 로마 시내

캐리어를 질질 끌고 딸내미가 서나 마나 한 줄을 다시 서고, 나는 표를 끊으러 간다. 둘 다 핸드폰이 안 되니 문제가 생기면 연락할 방법이 없다.

“딸내미~ 여기 꼭 그대로 있어야 해. 움직이면 안 돼. 엄마가 얼른 뛰어가 표 끊어올게.”

“응. 걱정 말고 갔다 와.”


마음이 급하다. 사기꾼 천지 로마에서 딸내미 잃어버리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허겁지겁 공항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매표소에는 가무잡잡한 남자 직원이 앉아있었다. 공항이라 그런지 다행히 영어를 잘한다. 버스 시간과 요금을 물어보고 트레비젼 버스보다 차라리 TAM 버스를 1유로 더 주고 타기로 결정했다.

“그럼, 4시 15분 TAM으로 두 장 주세요.”


티켓 받고 계산만 치르면 된다. 그런데 직원이 고개를 창문 밖으로 쭈욱 내밀고 두리번거린다. 애가 탄다.

“티켓 두 장 주세요. 내 딸 저기 혼자 있어요. 서둘러주세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이제 주섬주섬 짐까지 싼다. 혼자 캐리어 끌어안고 엄마 기다리고 있을 딸내미를 생각하면 한시가 급한데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다.


그때 창구에 들어오는 금발의 여자를 반갑게 맞이하더니 둘이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 교대 시간인 거다. 교대하는 5분이 50분 같다. 교대 시간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던 손님을 칼같이 다음 직원에게 넘기다니.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씩씩대고 버벅거리며 영어로 소리를 질러댔다.

“내 어린 딸내미 혼자 있어서 그렇게 서둘러 달라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내 표 끊어주고 교대하면 안 되냐? 너무 한 거 아니냐?”

photo-1438283173091-5dbf5c5a3206.jpg 뭐 이정도는 흥분한 듯

대충 이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 직원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잠자코 들어준다. 그러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길길이 미쳐 날뛰는 아시아 아주머니의 분노를 단 한마디로 정리한다.

“Sorry.”


바르셀로나 한국인 가이드의 ‘아이~어쩌다.’ 보다 더 짧다. 짧으니까 더 화가 난다. 그래도 미안하다는데 할 말이 없다. 표를 받아 들고 발이 엉키게 뛰어 딸내미에게 갔다. 다행히 딸내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짐을 지키고 서있었다.


“엄마. 왜 이렇게 뛰어와?”

“너, 잃어버릴까 봐.”

“별 걱정도 다 한다. 내가 여기 있지, 어디 갈라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숙소 주인장 시몬 생각이 났다. 도착 시간을 한참 넘겼으니 숙소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유심칩 꽂은 딸내미 핸드폰이 로마에서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 공중전화를 걸기로 한다. 영어 안내문은 물론 없고, 이탈리아어로 계속 떠들다 1유로 삼키고 또 삼킨다. 로마는 아마 이걸로 부족한 도시 재정을 채우고 있나 보다.


몸은 아프지 버스표 끊는다 난리 피웠지, 공중전화는 걸리지도 않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시몬에게 연락도 못하고 버스를 탔다.


드디어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테르미니 역에 내렸다. 벌써 다섯 시가 넘었다. 마음이 급하니 울퉁불퉁 돌투성이 길바닥에 캐리어 바퀴가 자꾸 끼고 휘청거린다. 돌바닥 사이사이에 누군가의 캐리어 바퀴가 꼭 박혀있다.


치안 불안한 낯선 도시에 도착해, 긴장으로 잔뜩 웅크리고 숙소로 내달렸을 텐데...... 뜯긴 바퀴 돌바닥에 박아두고, 절름발이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갔을 여행자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4시간 25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What happened?”


유창한 한국어로 얘기하고 싶은 욕구를 막 누르고, 캐리어 늦게 나온 얘기부터 공중전화 얘기까지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어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아무리 긴 사연도 짧아진다. 시몬은 나의 이야기보다 눈썹이 쌍으로 올라간 내 표정을 보고 상황을 이해한 듯하다. 고개를 끄덕여 주고 그래도 잘 도착해서 다행이다 얘기해준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로마에서 나를 이해해주는 내 편을 만난 것 같아 코끝이 찡해진다.


천장에 시원하게 돌아가는 커다란 팬과 에어컨이 달린 널찍한 방, 딸내미의 로망인 아늑한 다락방, 편리한 부엌과 화장실이 갖추어진 밝고 환한 아파트다. 마음에 쏙 든다.

_7242534.JPG 에어비앤비 로마 숙소

딸내미와 라면을 끓여먹고 긴장이 풀렸던지 내리 열 시간을 잤다. 아프니까 집 생각도 나고 남편 생각도 난다. 행복했던 런던, 즐거웠던 바르셀로나의 추억도 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남은 여행에 대한 기대도 사라지고, 힘들고 서럽기만 하다.


어서 몸을 추슬러야지. 된장국 수프를 뜨겁게 끓여 한 사발 마시고, 홍삼과 비타민도 마구 몸에 집어넣는다. 딸내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뒤로하고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기운을 차리자. 우리는 지금 로마에 와 있다. 일생에 꼭 한 번은 가보라던 바로 그 로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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