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확실히 기억의 배반은 아니다. 진짜 안 읽었다. 이름도 멋진데 왜 아직 안 읽었지?
tvN ‘책 읽어드립니다’에 ‘멋진 신세계'가 소개되었다고 독서모임 멤버가 물었다.
“기생충 봤어요?”
며칠 전, 알벤다졸 기생충 약 우리 가족 모두 먹긴 했는데, 아직 보지는…. 아무래도 내 기생충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빨리 알아차려 다행이다.
“킹덤 봤어요? 그거 재밌던데.”
“하우스 오브 카드 정말 재밌어요. 시즌 6까지 몰아보기 해봐요.”
직장 있는 독서모임 멤버들은 잠은 안 자고, 밤새워 넷플릭스 영화만 보는지 본 것도 참 많다.
그거 읽었어요? 그거 봤어요? 하면 벌써 읽었다고, 벌써 봤다고 아는 체 잘난 체하고 싶다. 내가 어려운 책도 좀 읽고, 새로 나온 영화, 미드도 다 따라가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마~~ 니 있나 보다.
불안하다.
불안하다. 난 그거 아직 안 봐서.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난 그거 아직 안 봐서. 나만 흐름 못 쫓아가는 구닥다리 될까 봐.
아는 체, 잘난 체하고 싶은데 읽어야 할 것, 봐야 할 것이 많아도 너무 많다. 먹고살려고 하루에 최소 8시간 일도 해야 하고, 기본적인 생리욕구도 해결해야 하고, 남은 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유튜브 영상과 영화와 책도 섭렵해야 한다. 백수가 과로사하기 적합한 시대에 우리는 산다.
심한 감기에 걸렸다. 정신이 멀쩡할 땐 글을 쓴다. 정신이 산만할 땐 책을 읽고, 정신이 혼미할 땐 넷플릭스를 본다. 며칠 동안 이불 뒤집어쓰고 귤 까먹으며 스스로에게 허락한 휴식, 넷플릭스를 뒤적인다.
TV 채널 198개 편성표만 돌려보다 리모컨 던지는 일이 다반사인데, 넷플릭스는 급이 다르다. 영화를 7만 개 넘는 장르로 구분하고, 사용자들의 입맛을 위해 빅데이터를 활용한다는데, 뭘 봐야 할지 뒤적일수록 더 혼란스럽다. 구글 검색과 ‘넷플릭스 영화 추천’ 유튜브를 이것저것 찾아보다, 본편 영화를 보기도 전에 지친다.
채널 서칭 하다 손가락에 쥐나봤어?
우리의 뇌는 하루에 특정 개수만큼의 판단만 내릴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서 그 한계에 도달하면 중요도에 상관없이 더 이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니얼 J. 레비틴 <정리하는 뇌>
감기로 지근거리는 뇌는 금방 한계에 도달한다.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은 못한다. 이럴 땐 나에게 이런 거 물어보면 절대 안 된다.
“엄마, 나, 콧대 올리고 광대뼈도 깎고 턱도 조금 깎아도 돼?”
“여보, 나, 콩팥, 친구한테 줘도 돼?”
우리 집 인간들이 이렇게 말해도 절대 ‘YES!’하면 안 되는데….
넷플렉스 뭐 볼까 고민하다 오늘치 뇌 용량은 다 썼다니까!
우리 집 댕댕이 까뭉이가 아무리 애절하게 이렇게 울부짖어도 절대 ‘YES!’하면 안 되는데….
“엄마, 나 발정기 왔는데 가출해서 커피 새끼 가져도 돼요?”
(‘커피’는 까뭉이 남친 치와와다.)
엄마, 나 진짜 그래도 돼요?
아는 체는 하고 싶고 볼 영화는 많고, 이 영화 불안은 또 뭘로 막나?
1. 넷플릭스를 끊는다.
다 볼 시간도, 자신도 없으니 아예 끊고, '나, 넷플릭스 안 봐요.'라고 말한다. 탐닉의 시간이 있었으니 금단증상은 각오하자. 신경 날카로워질 수도, 폭식, 무기력, 계속 졸릴 수도, 이유 없이 불안 초조할 수 있다. 불안 안 하려고 끊었는데 또 불안하다니….
2. 넷플릭스 영화를 추천할 만한 주위 인간관계를 끊는다.
“사교성은 인간의 가장 경멸스럽고 한심한 측면이다. 마치 양 떼처럼 영문도 모른 채 서로를 따라 하는 모습을 보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TV도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없던 시대에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겠다고, 양 떼 피해 월든 숲으로 들어간 소로우도, 피시 차우더 수프 만든다고 콩코드 숲 300 에이커(367,200평) 다 태워먹었잖아. 그러니까 주위 인간들을 정리하는 건 숲 태워먹어도 잘 안 되는 일이다.
3. 오지의 산으로 들어가 자연인으로 산다.
험난한 산에 올라 약초도 캐고, 풀뿌리에 대한 지식도 한의사만큼 쌓고, 나무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텃밭에서 가꾼 상추로 자연식 밥상을 차려 먹는다. 넷플릭스 영화는 물론 못 본다. 종일 항공지도 쳐다보다 오지의 지붕을 찾아 섭외한다는 <나는 자연인이다> 막내작가가 섭외하러 와서 다큐 찍기 전까진, TV도 안 본다. 자연인 하려면 체력도 인내심도 ‘안빈낙도’라는 확실한 인생철학도 있어야 하는데….
4. 지금까지 본 고전영화로 입을 막는다.
“너네 죠스는 봤어? 음악만 들어도 무서운 영화. 1943년 흑백영화 카사블랑카는? 히치콕 영화 싸이코는 봤고? 영화 고전이잖아! 마를린 먼로 뜨거운 것이 좋아는? 뜨거운 거 안 좋으면, 폴 뉴먼과 레드포드 콤비, 내일을 향해 쏴라는? 아직 안 봤다고? 시간 내서 다 챙겨봐~ 명작이야. 명작.”
아는 체하고 나니, 더 불안하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에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고, 중요한 일은 더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먹는 것, 읽는 것, 보는 것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면, 한 가지 메뉴밖에 없는 식당 가고, 한 권만 파는 서점 가고, 한 편만 상영하는 영화관 가면 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노력과 혜택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면 된다. 넷플릭스 영화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이제부터 입 근질거려도 나에겐 넷플릭스 영화 추천은 절대 하지 마! 들으면 불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