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진짜 이유] 트럼프 허풍도 부럽다

전세 이사 나가는 날

by 글쓰는공여사

“WHAT THE FU..?”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이것밖에 없다. 실전에 써먹을 핵심 욕을 정리해서 연습해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내 입에서 이렇게 자동으로 튀어나올 줄이야.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자면 ‘ㅆㅂ, 이거 대체 뭐야!’, 순화된 버전은 ‘이런, 빌어먹을!’이다.


이사 가는 날, 집주인이 동생이라는 사람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뒤에 따라 들어오는 공인중개사 아주머니가 가려서 안 보일만큼 한눈에 봐도 ‘떡대’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거들먹거리며 구둣발로 들어와 집을 훑는 꼴이 영락없는 ‘조폭’이다.


심장이 쪼그라든다. 바람소리에도 흠칫 놀라는 우리 집 겁보 까뭉이도 집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고구마 목에 걸린 듯 몇 번 컹컹 짖다가, 살벌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금세 조용해진다.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진 마. 장난감 가지고 놀기에도 바쁘니까.

9년 7개월 전세로 살았다. 25년도 넘은 아파트라 더디긴 했지만 전셋값이 서서히 올랐는데, 서울 사는 주인이 한 번도 올려달라는 얘기를 안 했다. 어느 날, 집 사둔 게 그제야 생각이 났던지 집을 판다고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동안 시세대로 못 받은 게 분했던지, ‘특별수선 충당금’ 600만 원을 반만 돌려주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집주인 대신 우리가 매달 관리비에 포함하여 납입했던 돈이다. 우린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했고, 집주인은 이삿날 조폭 동생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전세금을 온전히 다 받고 이사 갈 수 있으려나 불안하다.


불안하다.

불안하다. 조폭이 집을 뒤엎을까 봐.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조폭이 집을 뒤엎을까 봐. 전셋값도 제대로 못 받고 병원 신세 질까 봐.


양아치나 깡패, 조폭을 만나면 도망치거나, 그냥 돈을 주거나, 도움을 청하면 된다. 무섭다고 도망칠 수도, 그냥 '엣다! 더럽다. 다 가져라.'하고 던져줄 만큼 여유롭지도 않으니, 우리에겐 세 번째 선택밖에 없다.


“우리도 누구 부를 사람 없을까?”

남편에게 말했다. 심장 뛰고 무서워, 까뭉이 끌어안고 차 안에 이삿짐 내리는 것을 보며, 사돈의 팔촌까지 머릿속을 뒤지는데 단 한 명의 떡대도 없다. 전화하면 달려와 줄 친구 리스트에는 이제 머리 다 빠지고, 근육 손실 겪으며 팔도 안 올라가는 오십견 1년 차까지 환자만 그득하다.


이런 상황에 어깨 들먹거리며 허풍 떨어줄 국정원 다니는 먼 친척이 한 명 있기는 한데…. 연락한 지 30년도 넘어 아직 살아있는지 확실치 않다. 아무래도 인맥 동원은 포기다.


허풍이라도 부릴 뭐라고 있으면 좋은데, 삶에 1도 그런 게 없다. 덩치를 커 보이게 하거나, 위험한 생물과 닮았다고 어필이라도 해야 하는데…. 찌를 가시도, 부풀릴 양쪽 볼 살도 없다. 까뭉이가 어두운 데서 보면 눈도 번뜩거리고 늑대 같긴 한데…. 허풍으로 내세우기엔 민망하다.



이럴 땐, 세기의 허풍쟁이 트럼프에게 그 허풍의 0,00001%만 빌려오고 싶다. 난 정치는 잘 모른다. 남편에게 산책길 브리핑을 듣는 것 정도밖에 관심이 없다.

“요즘 트럼프 탄핵한다는데 그게 뭔 얘기야?”

남편은 핵심만 콕 집어 짧게 설명해준다. 남편의 요약정리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트럼프는 정말 ‘놀고 있네.’다. 그것도 잘 놀고 있다. 인생이 한 판 거하게 놀고 퇴장하는 놀이터이고 게임이라면, 트럼프는 제대로 놀고 있다.

제대로 인생 놀이터에서 놀고 있네.

1. 하고 싶은 말을 다한다.

세상 살면서 눈치 볼 사람이 수두룩한데, 똘끼 충만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트럼프는 이제 미국 대통령 자리에 앉아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산다. 뭔 말이 그 입에서 튀어나올까 불안해하면서도, 나라의 안전과 생존이 걸렸으니 조마조마하며 모두들 듣고 앉아있다.


조폭 동생 앞세우고 나타난 주인에게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넌 뭐냐? 시커멓게 옷 입고 온 놈 말이야. 동생은 뭐하게 달고 왔냐?” 그랬다간 타고 온 차에 숨겨놓은 각목과 회칼 출연할까 무서워 난 못한다.


2. 허풍 작렬이다.

트럼프의 공갈 허풍 협상술이 바닥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여전히 '위대한 합의'니 '위대한 대통령'이니 GREAT을 남발하며 끝까지 허풍이다. 트럼프야 부동산 재벌이라 '을'의 입장에 설 일도 없겠지만, 금발 휘날리며, 빨간 넥타이매고, 수행원 열 명 데리고 벤츠 타고 나타나, ““WHAT THE FU..?” 소리 한 번 지르면 다 끝날 일인데…. 난 빨간 넥타이도, 데리고 올 수행원도 없고, 그런 허풍 떨 부은 간뎅이도 없다.


3. 뭘 매번 바꾼다.

변화가 무서운 나는 매번 이사 가는 것도, 오르는 전셋값도 무섭고, 내 집 한 칸 없어 우리 가족 누을 곳도 못 찾을까 봐 전전긍긍하는데, 트럼프는 세계를 바꾼다. 세계 평화와 공존에는 위반되고, 자국에는 이익되는 방향으로. NATO를 뇌사상태에 빠뜨리고, 자유무역체제를 무너뜨린다. 어설프게 현상유지할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외과수술 과장 자리를 꿰차고 수술을 심하게 한다. '변화'를 바라는 미국 국민의 부름을 충실히 이행중이다.


조폭 동생 등장으로 트럼프 허풍이라도 있었으면 아쉬워하고 있는 사이, 남편이 신체 훼손 없이 온전한 몸으로, 온전히 전셋값을 받아들고 왔다. 난 어떻게 했는지 남편에게 묻지 않았다. 여전히 까뭉이를 안은 손에 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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