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이는 그럼 자퇴한 거야?”
“응.”
그게 다다. 친구 아들이 다른 사람이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대학에 입학하고, 1년 다니다 때려치웠다는데, 질문이 그게 다고, 대답도 그게 다다. 남편과 남편의 친한 친구들의 대화는 다 요 모양이다. 선승들끼리 선문답이라도 주고받는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짧은 대화가 끝나면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음악을 듣는다.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으면서 왜 만나서 그러고 있는지 궁금하다. 난 '현준이 자퇴'라는 두 단어만 듣고도, 언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학교가 재미없었는지, 앞으로 뭐하려는지, 후회는 안되는지,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낚아채서 쏟아놓고, 상대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동안 다음에 받아칠 말을 준비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짧은 할 얘기와 사이사이 긴 침묵이 잘 버무려져 자연스럽게 흐른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 우리의 힘과 자유가 있다. -빅토르 프랭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침묵은 물론이고 짧은 침묵도 어색해, 뻔한 얘기로 대화의 공간을 채우려 애를 쓴다. 뻔한 얘기에 마음 가득 담아 진심으로 반응하기는 정말 힘들다.
1. “잘 지냈어?”
“아니, 난 잘 못 지냈어. 그 사이에 남편하고 어긋나 이혼하고, 하던 장사 쫄딱 망해먹고, 애들은 대학 다 떨어져서 한 놈은 삼수, 그 밑의 놈은 재수 학원 다녀. 작년에 아버지 쓰러져 갑자기 돌아가셨고.” 지난 몇 년 동안 일어난 굵직한 사건 사고만 모아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브리핑하는 사람은 없다.
2. “날씨 참 좋지.”
“뭔 날씨가 좋다고 그래? 하늘 뿌연 것 봐. 입 막아, 입. 미세먼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천식, 폐질환, 심혈관질환 생긴대. 요즘 일교차는 또 얼마나 큰지, 나 일주일 동안 독감 걸려 죽을 뻔했잖아." 지나가는 날씨 얘기에 이렇게 정색하며 심각하게 받아치는 사람도 없다.
3. “언제 밥 한 번 먹자.”
"언제 먹을 건데? 내일 아님 다음 주, 다음 달, 아님 내년, 3년 후, 5년 후, 10년 후? 네가 먼저 연락할래? 내가 먼저 연락할까? 진짜 Rice 밥 먹자고? 뭔 밥으로 먹을까? 일식, 한식, 중식 어떤 거? 식당은 네 집 가까운 데가 좋아? 우리 집 가까운 데가 좋아?"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얘기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계획 짜자고 달려드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뻔한 얘기로 서로 소중한 시간 빼앗지 말고, 할 말 없을 땐 차라리 ‘침묵’하자.
당신에게 '침묵'은 어떤 느낌인가?
1. 침묵은 어둡고, 불편하고, 어색하고, 무겁다.
2. 침묵은 파랗고, 평화롭고, 평온하고, 조용하다.
침묵은 소리의 부재다. 그게 다다. 좋지도 나쁘지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도, 친구나 적도 아니다. 내가 극복해야 할 재난은 더욱 아니다. 만약 침묵이 어색하다면, 내가 갖는 느낌 때문이다. 침묵이 불안한 것은 침묵 그 자체가 아니라, 침묵으로 드러나게 될 내 모습을 더 걱정해서이다. -Dushka Zapata
불안하다. 불안의 이유는?
불안하다. 대화 중에 침묵이 찾아올까 봐.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대화 중에 침묵이 찾아올까 봐. 침묵으로 내 진짜 모습이 빤히 드러날까 봐.
침묵의 시간을 파도 소리가 채운다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3시간 넘게 말로만 대화를 이어나가면 지친다. 피곤하다.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뇌가 너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잠깐의 휴식을 필요로 하지만, 대화를 하려고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를 계속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침묵이 찾아오면, 그래도 침묵을 꼭 뭘로 채워야 한다면~
1. 부드러운 미소로 채운다.
입으로 소리를 만드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어색한 침묵도 현실에서는 몇 초의 시간일 뿐이다. 침묵에 편안해지면, 그건 생각만큼 무섭지 않다. 당신이 침묵을 편안하게 느끼면 상대방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2. 들려오는 소리로 채운다.
입은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대신 항상 열려있는 귀를 적극 활용한다. 길거리라면 나무가 흐느끼고 휘파람 불고 쉭쉭 거리는 소리를, 카페라면 옆 테이블 얘기하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커피 기계에서 커피 뽑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된다.
3. 음식으로 채운다.
입을 말이 아닌 먹는 용도로 사용한다. 다양한 먹거리를 계속 테이블 위에 놓아두면, 우린 입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할 일을 갖게 된다. 그 사이 우리 뇌는 잠깐이라도 쉴 수 있고, 말은 한 단계 진정되고, 입도 즐거울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아~ 나도 오늘부터 뻔한 말은 절대 내뱉지 않으리라, '침묵'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리라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건강검진받으러 병원에 가는 길이다.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 속도를 2~3초 정도 늦추고, 침착하게 웃고, 듣고, 말하고 내 차례를 기다렸더니, 간호사 서너 명이 나를 흘끗 쳐다보며 쑥덕거린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간호사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일본인이세요?”
졸지에 국적이 일본으로 바뀐다.
침묵을 '파랗고, 평화롭고, 평온하고 조용한 애'로 받아들이긴 역시 생각만큼 쉽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