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갔다 눈에 띄는 책이 있어,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집중해서 읽었다. 'The One Thing'
무엇이 중요한지 목표를 세우고, 실행할 4시간을 확보하고, 꾸준히 습관이 될 때까지 실천해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열심히 읽고 적고 도표도 그렸다. 바로 이거야! 나에게 지금 딱 필요한 책이야! 난 오늘도 책과 또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정리하며 열심히 읽었다
"남편, 나 오늘 정~말 괜찮은 책 읽었다! 집에 가서 주문하려고. 제목은..."
사랑에 빠진 책 자랑하느라, 남편과의 두 시간 산책길이 짧기만 하다. 저자 소개로 시작하여, 감명 깊은 부분, 내가 실천하고 싶은 습관과 굳은 의지 표명에서 클라이맥스를 달리다, 자기만족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남편은 정말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그동안 내가 자기에게 산책하면서 얘기해준 책이 대관절 몇 권이야? 다음부터 얘기 하나에 500원씩 내고 들어."
열심히 들어준 남편이 고마워 너스레를 떤다.
"요즘은 얘기하는 사람보다 들어주는 사람이 훨씬 비싸게 받는 거 알지?"
남편의 말에 난 급히 꼬리를 내린다.
"그럼 얘기 하나에 100원만 내."
"이거 자기가 말한 책 아닌가?"
남편이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나오며 말했다.
맞다! 'The One Thing'이다.
"어어~남편이 이 책 샀어?"
"아니. 난 안 샀는데…."
"그럼 딸내미가 샀어?"
옆에 있던 딸내미가 책 표지를 흘끗 보더니 말한다.
"내가 그런 책을 왜 사? 엄마가 샀겠지~~"
"뭐? 내가 이 책을 샀다고? 아니, 난 안 샀는데…."
책 한 권을 두고 3자 대면을 하는데도, 나는 모른다 서로 발뺌을 한다.
난 책을 받아 페이지를 넘기다 할 말을 잃는다. 책 곳곳에 밑줄과 하트 표시와 낯익은 내 글씨가 무더기로 출현한다.
'2018. 10'
책을 산 날짜까지 꼼꼼하게 적혀있다. 빼도 박도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1년 전에 사서 읽었다고??!"
낯선 증거물 확인하듯 책을 만지작거리며 소리친다. 그런 나를 남편과 딸내미가 걱정스레 쳐다본다. 민망함이 또르르 방 안을 굴러다닌다. 까뭉아! 그렇게 게으르게 눈만 디룩 거리고 누워있지만 말고, 엄마 좀 구해줘! 지금이야! 지금! 아빠랑 언니에게 산책 가고 싶다고 마구 칭얼대며 목줄 물고 와. 어서! 까뭉인 미동도 안 한다. 우리 댕댕이에게 내 눈빛까지 읽으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뭐? 뭐? 나에게 뭘 하라고?
불안하다. 왜?
불안하다. 1년 전 읽은 책이 기억에서 송두리째 사라져서. 그거 말고 진짜 이유?
불안하다. 1년 전 읽은 책이 기억에서 송두리째 사라져서. 이거 치매 아니야?
건망증은 용량 부족이고 치매는 데이터 손상이라는데, 난 책을 아•주•많•이• 읽•어 뇌의 용량이 부족한 거겠지~~. 내가 먼저 알면 건망증, 남이 먼저 이상하다 하면 치매라는데, 남편이 먼저 책을 들고 와 '이상하다'했으니
그럼 이건??!! 불안이 정점을 찍는다.
책 제목도 등장인물도 충분히 헷갈릴 수 있다. 이름 헷갈리는 거는 불안 축에도 못 낀다.
"딸내미, 내일 저녁에 엄마, 아빠 음악회 보러 갈 거야."
"그으래?" "응. 도스토예프스키 전곡 연주래."
"뭐? 도스토…."
"응. 도스토예프…. 아니다! 차이코프스키다."
예프스키든 코프스키든 뭐, 외국인 이름이야 헷갈릴 수 있다. 그래도 1년 전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은 책을 깡그리 머릿속에 지워버린 건 아무래도 불안하다.
이런 책 불안은 또 뭘로 막나?
1.에빙하우스 망각곡선과 책 읽기를 결합한다. 기억은1시간 지나면 44%, 6일 지나면 25%, 한 달 지나면 21% 남는다 하니, 1시간 후, 6일 후, 한 달 후에 같은 책을 3번 더 읽는다. 먹고사는 것도 바쁜데,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고서야, 시간까지 챙겨 같은 책을 읽기는….
2. 인생 책 100권을 선정한다. 그런 다음 남은 인생 내내 그 책들만 주구장창 읽는다. 새 책에는 눈도 돌리지 말고, 독서모임도 이참에 그만둔다. 100권 선정한다고 또 이 책 저책 읽고 다니면 말짱 도루묵인데….
3.분서갱유를 실시한다. 진시황은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도 묻었지만, 난 학자들까지 묻을 필요는 없고, 집에 있는 책만 모두 불태우는 거다. 읽을 책이 없으니 잊어버릴 책도 없고, 잊어버릴 책이 없으니, 1년 전 읽은 책 또 읽으며 감동할 확률은 '0'이다. 이게 제일 극단적이지만 확실할 듯하다.
그래도 그렇지, '출간 작가' 한번 돼보고 싶다고 글 부지런히 쓰는 내가, 책을 쌓아놓고 읽어도 시원찮을 판에, 책에 불 지를 생각이나 하고…. 지금 당장 나에게 중요한 'The One Thing'은, 책 불지르며 불안을 잠재우는 것보다, 내가 이미 글로 쓴 에피소드나 잘 기억해두는 것이다. 누군가 내 글에 이런 댓글 달면, 사기 팍 꺾여 글 계속 쓰긴 힘들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