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긴 죽어도 싫은 마음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전화번호입니다. 다시 확인 후~"
없다는데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 전화를 세 번이나 돌리고 또 돌린다.
쇼핑몰에서 '순면 자수 레이스 베개 커버'를 9,500원에 구입하고 2,500원 배송비까지 지불했다. 인터파크에도 같은 브랜드가 있었지만, 내가 사고 싶은 베개 커버는 자체 쇼핑몰에서만 판매되고 있었다. 12,000원, 피 같은 내 돈이 새어나간 순간이다.
배송이 늦어진다. 총알배송에 익숙해진 내 감각에 뭔가 불편한 게 걸린다. 쇼핑몰에 들어가 보니 주문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작은 쇼핑몰은 배송이 늦어질 수도 있지만, 일주일은 너무 하다 싶어 고객센터에 전화를 돌렸다. 없는 번호다. 불안하다. Q&A를 살펴보니 이미 거래가 거의 끊긴 사이트다. 이게 뭔가? 마음이 급해진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내 돈 손해 볼까 봐.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내 돈 손해 볼까 봐. 내가 사기당한 사람이 될까 봐.
1. 먼저 Q&A에 정중한 질문을 남긴다. 요지는 돈 받았으면 보내줘야지, 왜 안보내줘? 소리를 박박 지르고 있지만, 문체는 최대한 지성인답게.
2. '소비자고발센터'에 '고발'을 했다. 다음날 답변이 달렸는데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하란다. 뭔, 도둑이 든 것도 살인사건을 목격한 것도 아닌데, 경찰에 신고까지 해야 한다고? 아직은 거기까지 마음이 안 간다. 지식인 검색을 해본다.
3. 쇼핑몰 폐업 여부를 확인한다. 다행히 아직은 일반과세자로 운영 중이다.
4. 담당 지자체 통신판매업 담당 공무원과 통화를 한다. 별일 아닌 걸로 왜 자기를 괴롭히냐는 듯 심드렁한 시청 공무원 목소리에 덩달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의 의욕도 한풀 꺾인다. 그래도 쇼핑몰의 다른 전화번호를 받아낸다.
5. 새로운 쇼핑몰 전화 번호로 전화를 건다.
"여기 가정집인데요." 전화번호도 사기다. 이쯤 되니 난 확실히 '사기를 당한 거다.' 이성을 담당하는 전전두피질이 기능을 서서히 잃어간다. 몰골은 현대인이지만, 난 곰 껍질 둘러쓰고 앉아 언제라도 돌도끼를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는 원시인으로 정체를 바꾼다.
6. 공정거래위원회의 소비자상담센터 1372와 전화통화를 한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뭔 번호를 누르고 누르라 하더니 겨우 연결이 된다. '쇼핑몰 사기'니까, 자기네 소관은 아니고 경찰청 사이버수사대 182에 신고를 하라고 '친절한'조언을 매뉴얼에 따라 해 준다. 그래도 12,000원에 경찰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짠다.
7. 인터파크 '전자금융거래 분쟁처리 담당'이라는 긴 이름의 부서 직원과 통화를 한다.
혹시 그 쇼핑몰과 연락이 닿는 방법이 있는지 묻지만, 자기네 구매 물건이 아니라 방법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폭발 직전의 베수비오 화산처럼 마음이 부글거린다.
8. 드디어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 182에 전화를 한다.
신분증과 카드사 거래 내역, 쇼핑몰 결제 내역 등 서류를 구비하여 직접 방문하거나 경찰청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절차를 밟은 후 경찰의 내방을 받으라고 또 매뉴얼에 따라 '친절히' 안내를 한다. 미치겠다. 12,000원 돌려받자고 그 짓을 다 해야 한다니 기가 차다.
1시간 반이 걸렸다. '오늘 한 놈 나한테 걸리기만 해라. 죽는다!' 나의 뇌는 앞뒤 못 가리고 분노를 내뿜는 십 대의 뇌로 전환된다. 12,000원을 포기할까? 끝까지 추적해서 전모를 밝힐까? 갈등이 인다. 이럴 땐 '남편 찬스'다.
"재미로 천천히 해. 1년 프로젝트다 생각하고."
남편은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더니, 계룡산 도사 같은 얘기를 해결책이라고 떠억허니 내놓는다.
귀찮은 문제 손해 보지 않고 빨리 해결하려는 내 욕심 때문에 그리 내 마음이 요동을 친 거다. 안다. 그래도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난 분노 폭발 중인데, 그 우라질 쇼핑몰 주인은 자기 쇼핑몰 고객에게 뭔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밥 먹고 똥 싸고 운전하고 술 쳐 먹고 인터파크에 물건 판 거 돈 받고 있을 거 아냐?
손해 본 12,000원보다 그런 일을 내가 당했다는 사실이 더 분하다. 정체성에 대한 상처고 존재에 대한 위협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엉뚱한 곳으로 똥물이 튄다.
"나 오늘 저녁 안 해~ 치킨 불러!"
전업주부의 임무를 한마디로 무효화시키고, 수요일 밤을 불금으로 순식간에 전환시킨다. 닭다리 뜯고 맥주 퍼마시며, 넷플릭스 드라마를 눈만 껌뻑이며 어둠 속에서 몇 편 내리 보았더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더 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