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에서 아웅다웅 함께 살아가기
"아~~개 좀 저리 끌고 가요~~"
심술이 잔뜩 묻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똘똘 말고 다니는 목도리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지금 잡아당기고 있잖아요."
아주머니의 짜증 섞인 말투에 나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내 입장을 옹호한다.
우리 집 댕댕이 까뭉이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줄이 길어지면서 까뭉이가 걷고 있던 길을 벗어나, 산책하던 사람들의 앞을 잠깐 막아섰다. 난 급히 줄을 당기는데, 그 1~2초를 못 참고 마주 오던 아주머니가 짜증을 부린다.
"아니~사람 다니는 산책로에서는 줄을 짧게 하고 다녀야지 이게 뭐야!"
맞는 얘기이긴 한데, 가던 길 멈추고 모자로 꽁꽁 싸 두었던 눈까지 꺼내 사납게 부라리며, 반말에 삿대질까지 해댈 만한 일은 아닌데…. 50대로 보이는 눈부라리 여사의 공격에 나도 열이 팍 오른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낯선 이의 말에 내 마음이 휘둘릴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낯선 이의 말에 내 마음이 휘둘릴까 봐. 이 일로 두고두고 속상해하며 내 소중한 시간 망칠까 봐.
이럴 땐 호흡을 가다듬고,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쓰는 전략을 구사해야 했다. 정체성을 묻는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눈부라리 여사에게도 심각하게 던져야 했는데…. (궁금하신 분은 '추석이란 무엇인가' 경향신문 칼럼을 참고하시길.)
"개란 무엇인가?"
"산책이란 무엇인가?"
"인내란 무엇인가?"
"지구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과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난 너무 열 받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눈부라리 여사의 눈빛과 목소리와 비언어적인 신호를 보고, 나도 내 인격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머리끄덩이 잡고 경찰서 가고 소송에 휘말리고 싶은 욕구를, 목구멍의 침 겨우 삼키며 진정시켰다. 겁보 쫄보인 까뭉이는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꼭 붙이고 앉아, 뭔가 심상치 않은 전운에 주눅이 잔뜩 들어 꼼짝하지도 않는다.
눈부라리 여사는 끝까지 하고싶은 말을 다 뱉고 지나갔다. 칙칙한 하늘에서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졌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까뭉이를 쓰다듬고 내 호흡도 가다듬었다. 옆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벌어진 사태를 짐작했던지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분명 키우던 댕댕이 때문에 이런 일로 시비가 붙어 마음 상해본 말투다.
평소에 누군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그렇게 말하면 정말 알맹이 없는 말이라 싫었는데, 이번엔 그 말이 위안이 됐다. 지나가는 타인에게 상처 받고, 지나가는 타인에게 이렇게 또 위로를 받는다.
History.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나와 마주친 눈부라리 여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어떤 즐거움과 슬픔과 고통을 겪어왔는지 그 history를 모른다. 어린시절 개에게 물린 기억이 있는지, 이번 명절에 어떤 수고로움을 했는지, 시댁 식구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장애 아이가 있는지, 자식이 힘든 일을 당했는지, 90살 치매 시어머니를 몇 년째 모시고 있는지,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뼈 빠지게 일을 하고 있는지 난 모른다. 그 얼굴과 그 표정과 그 몸짓과 그 마음을 만들어낸 역사를 난 모른다. 모르니까 함부로 타인에 대해 아는 체하지는 말자.
그냥 눈부라리 여사는 댕댕이를 안 키우고, 우리는 댕댕이를 키운다. 눈부라리 여사에게 댕댕이는 귀찮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위협적인 하찮은 동물일 테고, 우리에게 댕댕이 까뭉이는 소중한 식구다.
작은 별 지구에서 아웅다웅 살면서 우리는 모든 걸 이분법으로 나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사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집을 소유한 사람과 집 없는 사람,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과 키우지 않는 사람.
서로의 영역과 권리를 칼로 무 자르듯 철저하게 구분하고 침해하지 않는 '0'인 상태로 함께 공존할 수는 없다. 내가 조금 손해 볼 때도, 양보해야 할 때도, 내가 양보받을 때도 배려받을 때도 있다.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우리를 지켜주기는 커녕 주인을 방패 삼아 자신을 보호하는 겁보 쫄보 까뭉이.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걸 달래서 겨우 집에 돌아왔다. 난 엄청 피곤한 산책이었는데, 까뭉이는 장난감 통에서 삑삑이 오리를 가져와 논다.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장난감으로 놀아도 싫증도 안 나는지 오늘도 재밌게 논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세상에 태어난 지 4년밖에 안됐는데, 험한 일 여러 번 겪고 견생을 배워가는 까뭉이가 안쓰러워, 돼지 귀때기 간식을 하나 건넨다. 이게 웬 횡재냐며 신나게 뜯어먹는다.
다행이다. 까뭉이는 벌써 다 잊어버리고 행복해서.
난 산책길에 눈부라리 여사가 모자와 똘똘 만 목도리 속에서 정체를 숨기고, 또 우리를 눈 부라리며 쳐다볼까 아직도 걱정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