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용기로 살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엄마는 그 맑은 얼굴의 개그우먼을 자주 생각한다
사람들은 다른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엄마는 놀이터에서 너 이마 왜 그래? 하고 악의없이 묻는 언니들의 질문에, 혹은 그 질문을 다급하게 말리는 그 언니들의 엄마들 손짓에, 시간이 쌓여 조금씩 부식될 마음을 미리부터 안아주고싶다. 그 바람을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가 만삭이 되어 출산일을 세고 있을 때, 넌지시 아빠에게 엄마와 아이 중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꼭 너를 택해달라고 말하고 분만에 들어갔단다. 엄마의 인생은 우리 딸로부터 이어져야 더 가치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너무 찐한 행복과 사랑을 엄마의 엄마에게, 가족에게, 남편에게 받았으니 너도 커서 그런걸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굳이 미토콘드리아의 모계유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엄마는 얼굴도 못보고 초음파로만 봤던 너의 존재를 너무나 사랑했던거야. 도대체 그런 사랑은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엄마의 영양분으로 지어내어서? 아니면 태동으로? 그냥 존재의 깨우침만으로도 폴인러브가 가능하다니. 너는 수정되어 너를 짓기 시작한 그 날로부터, 배아 태아일 때부터, 정말 소중했고, 행복했고, 엄마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렸어.
이렇게 모은 편지를 언제 네게 건넬까 생각했을 때, 역시 평상시가 아니라 네가 맘과 몸이 아플 때라고 예상하는 미래를 그려야한다는 것조차 미안하다.
엄마는 앞으로도 한 얼굴이 맑은 여자개그우먼을 오래토록 기억할거야. 그리고 그분이 고대라는 훌륭한 학벌과 안정적인 진로의 길이 아닌 위대한 인생의 도전을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분장없이도 웃음을 줬고, 그러나 무대뒤에서 얼마나 깊이 피부병으로 고통받았는지. 그 일이 있기전까진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어둠이 있었는지 몰랐어. 말했잖아. 사람들은 그저 타인의 고통에는 동감을 하거나 해주는척하지만 본인의 고통에 비할 수가 없지. 성인이 아닌 이상 제 손톱 밑 가시에 더 관심있을 수밖에 없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딸의 고통을 더 아파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선택조차 외롭지 않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때 배웠어. 아무도 엄마의 선택을 욕하지 않았어. 딸을 말렸어야했을까.
오늘 뜬 기사에는 대장암4기에 평생 병수발해온 엄마가 수면제를 덜먹어 혼자 살아남았고 먼저간 딸에게 그토록 미안해 했다는 내용에 다들 이 사람을 욕할 수 없다고 전했어.
엄마는, 네가 부디 이 생각까지는 안했으면 해. 그리고 이 편지를 줄 일 조차 없이, 단단한 나무처럼 자랐으면 한다. 하지만 행여나 네가 그런 마음과 유혹을 겪더라도 꼭 그 옆에 엄마가 있고,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엄마에게만큼은 온전히 나누어줬으면 좋겠어.
오늘 축제장에서 내가 나에게 하고싶은 말을 적어보자는데, 나지막히 '비밀'이라고 말했을 때 엄마의 가슴은 쿵했단다. 안그래도 과묵한 아이로 크고 있는듯한데 세돌밖에 안지난 우리 아가의 입이 앞으로 얼마나 더 무거워지려고 하는건지.
다시, 너의 현재의 아픔에 온전히 동감할 수 있는건 엄마와 아빠뿐이란걸.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너의 마음의 동반자가 되고 싶어.
엄마가 제일 암흑이었던 시간은 초등학교 4, 5학년이야. 왕따를 당하면서 반이 안바뀌고 올라가는 바람에 책가방의 끈을 잡고 얼마나 서럽게 울며 집으로 하교하곤했는지. 그 언덕을 다시 가면 지금도 마음이 안좋아. 그 어릴때 얼마나 끝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는지. 그 이후에도 그정도의 고통은 없었고, 그정도의 아픔은 없었단다. 나이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고통의 순간 엄마의 엄마는 초등학교에 가서 따졌고 모든 아이들이 한순간 그 주동자에게 척을 지는 대치 상황까지 만들어지더라. 통쾌했지. 반은 섞였고. 나이든 할아버지의 최악의 환경은 결국 종료되었어. 이후에도 소문과 주동자무리의 손아귀에서 오랜시간 고통받았지만 엄마의 휴식처는 엄마였고 따뜻했고 지금의 행복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 때 현실을 도피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책들을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르겠어. 결국 엄마는 고통이 거름이 되어 글을 쓸 때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었고 그 거름위에 키워낸 실력이 밥벌이를 하게했네.
아가,
엄마가 약속할께.
지금의 고통을 엄마에게 말해준다면 엄마는 결코 그걸 외면하지 않겠다고. 사선의 넘는 결정조차 동반자가 되겠다고. 그리고 그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부디 네게 이런 어두운 편지를 전해주는 일이 없기를.
"엄마 다리가 아파"라는 말에 괜시리 마음 철렁해 다리를 주물러주고, 엑스레이를 찍어야 하나 다시 아산가서 말을 해야하나 별별 생각의 회오리에 갇혀있다가 이렇게 또 엄마가 살겠다고 고인 생각을 몇 자 남겨본다.
사랑해 죽을만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