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다녀왔다

by gomgom

도서관에 다녀왔다.

가는 길에는 산비탈이 있어서 헉헉대니 남편이 매일 걸어와야겠다며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말한다.

겨우 편도 이십여 분의 거리지만 평지만 살살 걷다가 걷는 산길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숨도 헉헉거리며 들숨 날숨이 미친듯이 섞여 나왔다.


도서관에 간 이유는 상호대차를 신청해 도착한 책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박완서 작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 라는 책이다.


작년에 개정판을 낸 이 책은 스물다섯 나이인 아들을 잃고 그 고통에 몸부림치며 쓴 글이다. 읽어보니 의사로서 말썽 한번 안 부린 아들이 얼마나 예뻤을까 싶고, 그 고통이 얼마나 혹독했을지 도서관에서 시원하게 읽는 내내 소리 없이 울었다.


누군가의 슬픔에 기대 내 슬픔을 위로받지 않으려하는 마음은 첫째의 병에 대해 통보받은 직후였다. 아산병원은 굉장히 크고 많은 소아환자가 있었고, 함께 진료실에서 기다리는 어떤 환자에겐 주렁주렁 무언가 의료기구가 붙어있어야했다.


내 마음은 그때 비로소 내 슬픔과 고통이 누구보다 가볍다해서 절대 위로받지 말자. 비교하려고 하지도 말자. 쟤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으로 위로받으려 하면 얼마나 못난 사람인가. 그들은 내 딸을 보며 생각하겠구나. 우리 애는 선천성 희귀병은 없잖아! 건강하게 태어났잖아! 건강하게 태어난 걸로 됐지 하며.


그 고통스러움 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내 슬픔에 크기의 잣대를 거두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그 잣대를 갖고 온 것은 빵떡이를 잃고나서였다. 일분 일초가 죽을 것 같은 순간이었는데 그 고통속에서 내가 떠올린 것이 세월호 속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었다. 얼마나 슬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열달 안되게 품은 아이를 잃고도 이리 고통스러워하는데 곧 독립을 앞둔 성인이 될 아이들의 수학여행에서 자식을 잃는 다는 건 얼마나 더 큰 고통이었을까. 병실에 누워서 그 생각을 했다. 그 상황에서도 동감을 했다. 동감을 한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절대 동감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그러한 상황이 내게 왔다.



박완서 작가의 글에는 나의 매순간 거울처럼 빗대어 닮아있었다. 내 몸 건강한 것이 고통스럽다는 말에 한참을 울었다. 네 몸은 괜찮은거야? 라는 안부인사에도 너무 건강해서 내가 너무 미워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게 무슨 해괴망칙한 소리야. 라고들 했으나, 그래 나처럼 자식 잃은 부모라면 뭘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편한 것도 건강이 회복하는 것 마저 고통이구나. 그게 자연스러운거였구나.



책 속의 두 인물, 박완서 작가와 이해인 수녀 두 분 모두 나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작가이다. 내가 촉망받는 시인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동네 사람들. 신부님. 이해인 수녀님이 아빠가 청년 시절부터 활동하여 부모님이 결혼하신 그 성당에 오셨었을 때, 나보고 시를 준비하라 하셔서 만남을 주선해주셨다. 얼마전 친정에서 샷시를 교체한다하여 쾌쾌묵은 어릴 적 짐을 버리다 발견한 수녀님의 싸인. 글밥을 먹으며 이제껏 살았으나 훌륭한 시인은 되지 못했답니다. 그 분의 인자함이 나의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라면, 박완서 작가님과의 기억은 좀 더 나아가 고등학생으로 달려간다. 그때까지만해도 백일장에서 시를 쓰면 상을 타오던 시절이라 문학 소녀로서의 꿈을 놓지 않고 있던 때 박완서 작가의 특강이 근처 대학교에서 있었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로 굉장히 유명한 작가를 만나게 된다니 가슴이 떨려서 앞자리에 앉아 작가님의 얼굴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씀을 너무 더듬으셔서, 달필이 곧 달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구나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다시 달려가 마흔을 앞둔 내가 두 작가님과의 인연을 맺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 때는 알았을까. 이 크나큰 고통이 내 가슴에 떨어질 지. 얼마나 큰 무게로 짓이길지. 숨을 쉴 수 없이 힘들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해야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나마 슬픔의 긴장을 낮출 수 있었다. 시시때때로 그 압력은 강해져서 긴장의 고삐만 놓여지면 풍선은 부풀어올랐다. 때로는 식당 앞 작은 아기의 발을 보며, 산책길의 유모차를 보며.



어릴 적 성당에서 무슨 행사를 하며 욥기를 전부 필사한 적이 있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을 아마 앞두고 했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가 서술했듯이 자식을 잃고 두배로 갚아준다 한들 그 자식을 잃은 마음이 회복되겠냐고.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소리쳤다. 도대체 제가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두번의 유산 끝에 가진 아이의 사산. 나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더이상 당신을 믿을 수가 없다고. 나는 욥처럼 절대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부정하지 않는 그런 믿음 없다고.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고. 그 작을 관을 안고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빵떡이가 가던 날, 그 날은 추운 겨울이었다. 제왕절개의 상처가 아물어야 퇴원을 하고 영안실에 있는 아기가 비로소 나올 수 있다하여 그 작은 아이를 만나기 위해 나는 미친듯이 밥을 먹었고, 몸을 일으켰고 화장실을 갔고, 입원실 바닥을 뱅뱅 돌아 걸었다. 아이의 장례를 위해.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그 차디찬 공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아들 잃던 날 아귀아귀 먹은 소고기가 한으로 남아 고기를 먹을 수 없다던 작가와 달리, 나는 애를 죽은채로 낳아놓고도 미역국을 아귀처럼 먹어댔다.


차디찬 돌처럼 얼어있던 아기의 살결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평생 나는 그 감촉을 잊지 못할 것이다. 빵떡이와 있었던 모든 기억이 어느 순간 흩어지고 풍화작용을 일으킨 필름처럼 떠버릴 테지만,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다시 열어봤을 때 읽었을 때 전부 생생해져버리게. 그래 이 글은 영원히 그 아이를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이자 족쇄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다른 위로가 될 것이다. 슬픔의 자를 든 또 누군가에게. 내가 오늘 도서관에서 위로받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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