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편한 점은 없나요?"
의사가 다정하게 물었다.
"약을 먹지 않고도 잘 자는 편이에요. 그런데 여전히 마트, 병원, 버스, 은행...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에 가면 숨이 막혀요. 무거운 쇳덩이가 가슴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자세히 설명해 보실래요?"
"음, 시야가 좁아지면서 빙글빙글 돌아요. 어지럽고, 사방에서 저를 짓누르는 느낌이에요."
"이곳에서 당장 빠져나가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아직도 공황 증상이 있어요?"
"많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제가 숨 쉬는 법 알려드렸죠?"
"네."
"깊이 들이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숨을 쉬세요, 천천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둘째 아이를 훈육하다가 공황 증상이 올 것 같았다. 숨이 가빠지면서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내가 곧 죽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서 의자에 앉았다. 주눅이 든 둘째가 나를 따라왔지만 엄마는 이제 괜찮다고, 얼른 밥 먹으라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천천히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과호흡으로 벌써 많은 산소를 들이마신 탓에 손발이 저리고 부들부들 떨렸다. 자칫 잘못하다간 예전처럼 바닥에 털썩 쓰러져서 기절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평온한 바다를 떠올렸다.
가빠지는 호흡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천천히, 천천히-
미친 듯이 몰아쉬던 호흡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평소처럼 돌아왔다.
눈물이 찔끔 났다.
숨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도, 내가 공황 발작 직전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도 모두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끔찍한 상상을 하다가 그만둬버렸다.
열다섯 해 전쯤, 과호흡 증후군 때문에 한동안 응급처치 용으로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다. 그때 정신과에 가서 빨리 치료를 받았다면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금방 나았을까? 가끔 고민해보지만 답은 모르겠다. 나는 스트레스가 많다고만 생각했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조차 못했으니까.
인생에서 '만약'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은 막강하다. 되돌릴 수 없다는 커다란 상실감을 맛보게 하고 사람을 무기력 속에 밀어 넣는다.
『한낮의 우울』 저자인 앤드류 솔로몬의 어머니는 암으로 고통받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약을 먹고 서서히 죽어갔다. 어머니는 그날을 위해 처방받은 신경안정제를 조금씩 모아두었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한 뒤부터 오히려 생기가 넘쳤고 행복했다.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순간이 자신에게 예비되어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를 오랫동안 해왔다고 믿은 솔로몬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역시 어머니의 자살이 아니었다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책을 읽으면서 잠시 고민해봤지만 여전히 답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만약'이라는 단어를 인생에서 빼버렸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다. '만약'이라는 단어로 또 다른 생을 꿈꾸지만 행복한 장면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행동뿐이다.
의사가 일러준 대로 가슴이 답답할 때는 천천히 숨을 쉰다. 불안 때문에 못 견딜 것 같으면 내가 좋아하는 피카추 인형을 꼭 끌어안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꿈꿔왔던 일이나 마음먹은 일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경험을 했다고 나를 다독인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몸으로 익히고 마음에 새긴다.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런 행동을 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칭찬해줘도 된다. 누군가는 암기과목 공부하듯 하나하나 익히고 기억해야 하니까.
호흡이 가빠져서 팔다리가 저리고 마비된 경험은 끔찍했다. 서랍 속에 수북한 약봉투를 바라보며 착잡한 기분에 휩싸이는 일도 이젠 지겹다. 그러니 오늘 내가 기억할 일은 하나다.
가슴이 답답하다면 숨을 천천히 쉬자,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