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2살 많은 고모가 있다. 나는 고모의 엄마에게 '할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고, 엄마 역시 고모의 엄마에게 '어머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엄마에겐 항상 그 여자였다. 나도 '그 여자'라고 불렀다.
엄마는 고추땡초보다 매운 시집살이를 했다. 임신한 몸으로 고모의 똥기저귀를 빨아야 했고, 영문도 모른 채 몇 시간씩 무릎을 꿇고 벌을 섰다. 항상 시가에 가면 엄마는 배가 고팠다. 그 여자는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맛 좋고 빛깔 좋은 음식들을 숨겨두고 엄마에게 잘 주지 않았다. 전셋집 구하라고 할아버지가 준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늘 맘 약한 아버지를 구슬려서 돈을 타갔다. 그럴 때마다 그 일이 부당하다고 아버지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엄마는 나를 붙잡고 그 여자 욕을 했다. 자신이 겪은 비참한 일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때면 나는 엄마의 딸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바뀌었다. 여전히 엄마의 딸이고 싶고, 엄마에게 기대고 싶은 어린아이인데 엄마는 내 마음을 몰랐다.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어서어서 자라서 엄마의 푸념을 듣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른 아이였다면 좀 달랐을까? 빨리 어른이 돼서 엄마를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을까?
엄마가 내뱉는 말이 너무 아파서, 엄마가 그런 일을 겪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그런 모진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뼛속까지 시렸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지. 어린 나는 그 여자에 대한 원망보다는 나를 붙잡고 자신의 마음을 풀어놓는 엄마가 더 싫었다. 엄마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내게 떠맡기는 것 같았다. '딸인 너는 엄마 편을 들어줘야 한다, 같이 분노하고 미워해야 한다.'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런 감정을 알고 싶지 않았다. 애써 겪고 싶지 않았다.
30대의 엄마는 화병과 폐결핵, 만성 두통으로 고통받았다.
마트에서 커다랗고 알이 꽉 찬 가자미 3마리를 샀다. 깔끔하게 손질한 상태라서 나는 그저 구우면 됐다. 한창 가자미를 굽고 있는데 엄마가 음식을 들고 집에 왔다.
"가자미 굽니?"
엄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손에 든 접시를 바라보니, 머리만 겨우 떼어내서 구운 작은 가자미 3마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엄마! 제발 말했잖아요. 이런 거 가져올 때면 미리 말하라고요."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감정 표현에 인색한 엄마가 자식과 손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요리밖에 없었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훌륭하지만 때론 내 입에 맞지 않았고, 나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았다. 오늘처럼 메뉴까지 겹치면 정말 난감하다. 한때 음식 스트레스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 엄마가 주는 음식을 다 먹지 못해서 버릴 때도 있었고, 억지로 먹다가 토한 적이 부지기수다. 나는 양이 너무 많으면 조금 덜어서 다시 돌려드렸고, 먹기 싫을 때면 아예 안 먹겠다고 선언했다.
이 모든 일은 그거 하나면 해결할 수 있었다.
미리 전화해서 '엄마가 이런이런 거 요리할 텐데 가져다줄까? 먹을래?' 내게 물어보는 일.
작년 여름에 같이 병원을 다녀간 이후로 엄마가 조금 노력하는 듯했으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한 번만 말해서는 절대 모른다.
엄마는 자신의 가자미는 내일 먹으라고 말하며 그릇을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심통이 난 채로 프라이팬 앞에 서서 가자미만 노려보았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엄마는 도대체 왜 말을 안 하는 걸까?
'애써 구워왔으니 네가 좀 먹어라! 다시 가져가라고 말하면 내가 서운하잖니. 맨날 요리해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들으니 힘이 빠진다.' 엄마는 왜 이런 말을 할 줄 모르는 걸까?
약 먹고, 상담받은 딸내미는 이제 참지 않고 맘 속에 있는 말을 턱턱 뱉어내는데
엄마는 입에 천근만근 무거운 돌을 매달아놓은 것처럼
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걸까?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는데 엄마 때문인지 가자미 때문인지 헷갈렸다. 내가 산 가자미보다 엄마가 준 가자미가 훨씬 작았다. 돈 더 주고 커다랗고 좋은 가자미를 사면 되지 왜 만날 시장에서 머리까지 달린 작은 가자미를 잔뜩 사 오는지 엄마에게 짜증이 났다.
평생 하던 대로만 하면 좋은 것도 못 먹고, 맛난 것도 못 먹는다고요.
엄마, 이제는 좀 달라져요.
나는 엄마가 또 아프면 어쩌나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특기는 '필요한 말 안 하기'이고
나이 든 엄마는 이미 이곳저곳 고장 난 곳이 많으니
내가 성질을 좀 죽이든지 부드럽게 말하든지 해야겠다.
*배경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