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토한다. 상한 음식을 먹어서, 구역질이 올라와서도 아니다. 내 의지대로 토하는 것이다.
오늘 가자미랑 눈이 마주쳤다. 죽어 생물 상태로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앉은 녀석은 입을 꽉 다물고 나를 쳐다봤다. 낙지 위에 굵은 소금을 뿌려서 벅벅 씻고, 살아있는 전복을 기절시켜 숟가락으로 살과 껍데기를 분리하는 내게 그깟 생선 쯤이야, 호기롭게 생각하지만 생선 눈알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같다. 그 놈의 눈알! 살아서 내게 호통치는 것 같다. 아니, 애원하는 것 같다.
비릿한 냄새와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물컹한 느낌에 몸서리쳤다.
느닷없이 내게 생선을 안겨준 사람에 대한 원망이 이상한 방향으로 소용돌이 쳤다.
그날 저녁, 나는 많이 먹었다. 물론 가자미는 먹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니 숨쉬기가 버거웠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화나는 건 엄마의 무심함일까?
엄마 딸은 생선을 싫어한다고! 생선 비린내도 싫고, 생선 뼈도 싫고, 생선 눈알도 싫다고요!
냉장고에 들어앉은 가자미를 다시 가져가라고 말하려다가, 조용히 버릴까 고민하다가 다음 날 구워먹었다.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가위를 들었다. 가시같이 돋아난 양쪽 지느러미를 잘라 버린 뒤, 칼로 머리를 내리쳤다. 물론 등이 아래쪽으로 향하게 눕힌 상태다.
곱게 몸뚱이만 남은 가자미는 프라이팬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졌다.
"엄마, 무슨 생선이야?" 첫째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가자미야."
"알도 있어?"
"없어. 프라이팬 뜨거우니까 저 쪽으로 가 있어."
첫째가 사라지자, 이번엔 둘째가 다가온다.
"엄마, 물고기, 물고기."
"맞아."
"먹어도 돼?"
"아직. 다 구우면 줄게."
우리집 아이들은 생선이라면 환장을 한다. 그래서 난 생선을 사지 않는다. 냉동실에 가득 들어찬 생선을 볼 때마다 몽땅 버리고 싶다는 불온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이들이 생선을 잘 먹는 것은 좋지만, 나는 생선이 싫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싫은 것이 우선이다.
엄마도 이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가자미는 갓 태어났을 때, 다른 물고기처럼 머리 양쪽에 두 눈이 붙어 있다. 자라면서 점차 왼쪽 눈이 오른 쪽으로 이동하고, 몸도 우리에게 익숙한 모양으로 변한다. 치어일 때는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치다가 눈이 모이면서 바닥에서 생활한다. 외양이 달라지면서 삶의 방식도 변했다. 가자미의 운명 자체를 봤을 때, 입체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사람도 이런 입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못된 사람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눠서 구분 지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성격상 특징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며칠 전, 첫째가 초등학교에 갔다.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아이를 처음 학교에 입학시킬 때, 어떤 부모들은 운다고 하더라. 넌 어땠니?"
"저요? 아무렇지도 않던데요?"
이건 거짓말이다. 교문 앞에서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품 안의 자식이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것 같아서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 네 엄마는 네가 수능 칠 때 눈물을 글썽이던데."
난 가끔 내 기억에 오류가 있지는 않나 의문을 품는다. 내가 엄마에 대해서 잘못 기억하고 있나? 엄마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자세가 부족한가? 어찌되었든 나는 엄마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
엄마가 가져오고, 내가 손질해서 구운 가자미 6마리는 이틀 동안 아이들의 맛난 반찬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생선 살만 발라서 숟가락 위에 한 점씩 올려주었다.
엄마, 나, 아이들.
정반합 같은 이 이상한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겠지. 엄마는 내게 계속 생선을 가져올 것이고, 난 그때마다 투덜거리면서 생선을 구울 테고.
사실 엄마가 왜 생선을 가져오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냉장고에 남아 있는 커다란 가자미 5마리도 곧 없애버릴 테다.
모조리 구워서 아이들에게 몽땅 줘버리고 말테다.
난 여전히 먹기 싫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