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죄책감과 자책
"그다지 힘든 일은 없어요. 가끔 누가 나를 미워한다고 느끼거나 내가 하는 행동이 밉상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며칠씩 땅굴을 파면서 지내지 않아요. 자고 나면 흘러가버려요. 아마 약 용량을 늘려서 그럴지도 모르죠."
그는 내 말을 유심히 듣더니 입을 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당신이 많이 노력한 덕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울증을 워낙 오래 앓아서 그런 감정들이 아예 없어지진 않을 거예요."
의사는 내 진료기록을 잠시 훑어보았다.
나는 다음 말을 천천히 기다렸다.
"죄책감을 느끼는군요."
"... 맞아요."
그가 어떤 기록을 보고 하는 말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제 감정의 기저에는 죄책감과 자책이 깔려 있어요."
"어떤 상황일 때 그런 생각을 하죠?"
"제가 점심을 먹고 항상 운동장을 걷거든요. 운동화로 갈아 신고 뛰다시피 걷는데 20분 정도 돼요. 사람들이 일 안 한다고 수군거릴까 봐 사실 눈치가 좀 보여요. 밉상이나 꼴불견 같을까봐 위축될 때가 있어요."
"점심 먹고 걷는 사람은 없나요?"
"물론 있죠. 잠시 산책 겸 한 두 바퀴 정도? 저처럼 작정하고 운동하는 사람은 없어요. 땀을 뻘뻘 흘리거든요. 저 나름대로 합리화는 해요. 걸으면서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학생들이랑 인사도 나눠요. 저랑 같이 걷는 애들도 가끔 있어요. 고작 20분 걷는다고 일을 펑크 내거나 안 한 적도 없고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운동장을 걷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평균적인 생각 말이에요."
나는 의사가 말한 평균적인 생각에 집중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때요?'와 함께 부정적으로 쏠리는 사고 의 방향을 전환시켜주는 질문이다.
"아마 운동 열심히 하네? 그 정도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딱히 타인에게 관심 없잖아요. 뭐, 운동하는구나, 하고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아요."
"뭔가 다른 사람이 날 싫어한다고 느끼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는 게 좋아요. 내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늘 하던 생각에 머물러 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 좀 달라질 수 있어요. 생각의 방향이 바뀔 수 있는 거죠."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어떤 상황에서 우울이 올라오는지 패턴을 파악해봐요."
"그게 도움이 되나요?"
"내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무의식 속에서 우울과 불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분명 있을 거예요. 패턴을 안다고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분명 공장 문을 닫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사실 나는 그의 마지막 조언을 이해하지 못했고 다시 물어보았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여러 명의 대기 환자들이 떠올라서 입을 닫았다. 두 번이나 설명을 들었는데 이해를 못 한 나 자신이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묻는 일이 눈치가 보여서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