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생에게 엽서 한 장을 받았다. 나는 봉투를 열고 엽서 내용을 읽은 뒤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고 서랍 저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엽서 위에 적힌 내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그렇게 수업을 하는 줄 알지만, 그게 뭐라고-
학생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과 우울과 불안으로 일그러진 내 모습 사이. 그 거대한 간극을 견딜 수 없었다.
배부르면 토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다스려야 하며, 무언가 맘에 들지 않으면 자해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안간힘을 쓰고 참는다. 때론 옹졸하고 비겁하며 용기도 없다. 강박증 때문에 스스로 미쳤다고 느낄 때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엽서 속 내 모습은 아주 달랐다. 자주 웃고, 자주 노래했다. 피카소에 빙의한 듯 현란한 팔 동작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실력이 힘을 잔뜩 준 폼에 비해 너무나 비루해서 웃겼다. 수업 시작할 때는 오늘 무엇을 배울지 꼭 소개했으며, 지루하다 싶을 때면 밑천이 바닥날 때까지, 밑바닥까지 벅벅 긁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버젓이 국어 극혐이라고 적어놓은 교과서를 보고도 웃었으며, 동굴처럼 깊숙이 숨어버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안간힘을 썼다. 중학교 선생이란 직업이 그네들 인생의 간이역 같아서 그들이 잠시 쉬다 떠나고 나면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늙어 늙어 쪼그라들 일만 남겠지만 그것 또한 내 운명 같아서 달리 슬퍼하지 않았다.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나는 내가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수업을 했고, 오로지 나를 위해 한 행동이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환하게 웃으며 즐겁게 수업하는 내 모습을 기억했다. 학생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선생이 이렇게 지내는 줄, 이런 마음으로 사는 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어차피 헤어지면 그만이라며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를 찾아오겠다거나 만나고 싶다거나 졸업 후에도 연락 오는 제자들의 청을 칼같이 거절했고, 전화번호를 바꿨다.
사실 귀찮았다.
그들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교과서도 없었고, 국어 수업시간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할 말은 이미 지난 시간 속에 다 던져두었다. 그들이 내게 딱히 바라는 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내겐 부담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니 모든 것이 텅 비어버렸다.
위태로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나를 지탱해줄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아야 했다. 나는 껍데기만 걸친 게 아니라고, 알맹이도 있다고 믿고 싶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야 했다.
손바닥만 한 엽서를 가득 채운 마음은 나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었다. 그 많고 많은 만남 가운데 나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는 일을 내가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었다.
소설 『긴긴밤』에서 흰바위 코뿔소 노든이 그 많은 이별과 죽음을 견디고 아기 펭귄을 돌본 것도 결국은 사랑받았던 기억 덕분이었다. 초원을 향해 떠나길 주저하는 자신에게 "넌 이미 훌륭한 코끼리야,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네."라는 말을 건넨 코끼리 할머니의 사랑을, 코끼리 떼에게 받은 사랑을 노든은 내내 기억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기 펭귄과 헤어지면서 노든은 이렇게 말한다.
"넌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난 그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이 사랑을 받았을까? 그들이 내게 부친 편지가, 내가 반송하고 싶고, 읽기 꺼렸던 편지가 내겐 얼마나 많았던가? 그 많고 많은 엽서의 발신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눈을 감고 지난 세월을 떠올려보니 마음이 아렸다. 어찌 보면 내가 서랍 속에 밀어 넣고 두 번 다시 읽지 않은 그 많은 엽서들이 모여서 내 삶을 굴리고, 흐르게 했다는 사실이 또렷이 느껴졌다. 사랑받은 기억이 있다는 사실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내게 편지를 보낸 발신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못난 선생이 이제야 그 편지를 읽었다는 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