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고 깊은 터널

by 키키 리리

교장선생님이 다가오더니 내게 공문 하나를 보여주셨다.

"이건 선생님이 할 일입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가리키는 부분을 쳐다보았다. 아직 내게 배정되지 않은 공문이라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몰랐다.

"1월 19일까지 보고해야 해요. 이틀밖에 안 남았어요. 사전 수요조사니까 (제가 알려주는 내용을) 입력만 하면 됩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에두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음, OO 부서 일이 아닌가요?"

그는 어떤 대목을 가리키더니 대답했다.

"이 부분을 보면 (당신이 할 일이) 맞아요."


좀처럼 수긍할 수 없어서 몇 번 더 말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가 건넨 공문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른 사람에게 길게 하소연했다. 결국은, 내가 하는 게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울의 터널 속으로


모두 떠난 교무실에 홀로 앉아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오늘 하루는 엉망진창이었다. 전보 서류 잘 못 쓴 선생님 뒷수습하느라 동동거렸고, 기간제 교사 면접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연락도 없이 면접자가 불참하는 바람에 전화를 몇 차례나 돌렸고, 공모사업 공문을 제대로 안 읽고 진행하느라 진땀을 뺐고, 학생들을 만나서 졸업식 축하 영상 제작 과정도 챙겼고, 이 와중에 교장 선생님과의 일까지.


양손으로 턱을 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창문 너머 흐린 하늘을 바라보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모두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고가 비이성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


교장선생님께 거침없이 의견을 말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오기를 부린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틀려서 부끄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일을 하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내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사건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비일비재하게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사회적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찌질한 투정이었지만 그 순간엔 정말 고아가 된 것 같았다. 곁에 아무도 없었다.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어두워진 하늘이 찬바람까지 몰고 왔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노트북과 가방을 들고 서둘러 뛰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데 마음은 자꾸 학교를 보고 있었다. 슬픔은 길게 길에 드리워졌다. 운전한 거리만큼 늘어진 슬픔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우울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왜 그토록 외로워했을까?


이 글을 쓰기 위해 깜빡이는 커서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지독한 한기가 몰려왔다. 추웠다.


밤마다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잔다.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는다. 그래도 추워서 곁에 누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잔다.


내 의견을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

네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는 말조차 듣지 못한 상황.


이 글을 쓰는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환기하는 과거의 일이 무엇인지. 그것은 거부당한 기억이었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외롭고 슬픈 것이 아니었다. 마음은 어느새 과거로 떠나가 어린 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 과거 어느 상황으로 가 있었다. 잘 다독여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과거의 나는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어린 나는 달래 달라고 울었다. 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 녀석은 원금에 이자까지 혹독하게 쳐서 빚쟁이처럼 따라다녔다.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났고, 안심하고 있으면 긴 그림자를 끌며 슬며시 나타났다. 괴로운 노릇이었다.


더 괴로운 일은 이렇게 살다가는 영영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적인 예감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어찌하여 이토록 제자리인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는 잡고 서고 걷고 뛰고 그러다가 엄마가 잡을 수 없을 만큼 날아다닌다. 나는 날고 싶지도 뛰고 싶지도 않다. 그저 한 걸음 떼고 싶을 뿐이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걷고 싶지도 않다. 걸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난 또 무얼 잊었을까? 잊고 싶은 일은 잊히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은 생각조차 나질 않는다. 그렇게 오늘 밤도 난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잠들 태세다.


누가 내 마음을 알고 긴 톡을 보냈지만 뭐라 말하기 싫어서 다음과 같이 답을 보냈다.


괜찮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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