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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Sep 19. 2022

터널을 빠져나와서

지난주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께 내 상태를 말했다. 난 우울한 상태를 주로 터널에 진입했다는 비유로 설명하지만 그날은 골짜기와 산등성이의 굴곡으로 이야기했다. 파동처럼 구불구불한 곡선을 손가락으로 그어가며 입을 여는 나를 의사는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골짜기에 내려갔을 때의 상태는 자존감이 낮고 마음이 짓눌리다 못해 산산조각 나 버렸고, 산등성이에 올라갔을 때의 상태는 내가 정말 우울증을 앓는 게 맞냐고 느낄 정도로 멀쩡했다. 즐겁게 웃고 떠들며 매사 활기차진 않지만 피곤을 덜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삶이 원만히 흘러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 달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도 현저하게 달라서 의사는 유심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넓게 보면 사람마다 굴곡의 모양이 모두 다르다고 했다. 게다가 위로 올라가서 머무는 시간이나 아래로 내려가서 머무는 시간도 모두 다르다고. 내가 조울증 일리는 없지만 길게 관찰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기분 안정제의 용량을 늘리고 항우울제의 용량을 줄이는데 합의했다. 


솔직히 터널에 진입하고 빠져나올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어느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헷갈렸다. 사실 답은 알았다. 이 두 모습 모두 나임이 틀림없다고. 그러나 그 모습들을 통합하고 하나로 모으는 데 늘 진절머리가 났다. 또 터널에 진입했구나, 이제야 터널을 빠져나왔구나. 이 모습도 나고, 저 모습도 나고. 사람이 한 가지 얼굴로 살 수 없고 늘 일정한 감정의 농도를 유지할 수 없으니 내면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단다, 누군가 다정한 말로 설명하겠지만 나는 "어쩌라고?"를 외칠 뿐이다. 어쩌라고, 나도 모르겠는데. 어쩌라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삶에서 의미를 찾지 말고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춰라

인생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해줄지 기대하지 말고, 내 인생에 어떤 일을 선물할지 고민하라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지만 이건 터널을 빠져나온 내 목소리일 뿐이다. 터널에 진입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삶 앞에 꼬꾸라져서 발을 질질 끌며 살아갈 게 뻔하다. 지친다, 지치고 지친다. 사는 일은 언제나 지치지. 배터리가 방전되기 직전 불빛이 깜박깜박거리듯 뭐든 숨이 넘어갈 듯 꼴깍꼴깍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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