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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Sep 26. 2022

모든 만남은 어렵다

 

단톡방에서 어떤 분이 번아웃과 우울증 증상을 호소하시길래 그동안 너무 달리셨으니 좀 쉬셔도 된다며 "병원을 소개해드릴까요?"라고 말했다. 당연히 거절하셨고 나는 내가 실수를 했나 싶어서 한동안 얼어붙은 채 톡 창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눈치 없게 "그래도 많이 힘드시면 말씀해주세요. 전 계속 병원 다니니까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서 병원을 자주 오가는 나에겐 병원 문턱은 엄청 낮다. 내가 그렇다고 상대방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말투나 표정, 손짓 따위를 고려할 수 없는 단톡방에서 공개적으로 물어봤으니 내가 눈치가 없기는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아닌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다는 내 비합리적인 신념과 맞닿아서 밤새 나를 괴롭혔다. 


아침에 일어나니 간밤에 꾼 꿈의 조각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줍다가 손가락을 베이고 기침을 했다. 목이 따가웠다. 꿈속에서 어찌나 애를 쓰며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는지 온 몸이 뒤틀리듯 아팠다. 눈을 다시 감았다. 안전지대를 떠올렸다.


내게 안전지대는 지난봄과 여름에 두 번 다녀왔던 산복도로 풍경이었다. 유치환 우체통에서 민주공원 방향으로 난 그 길고 긴 길을 몹시 좋아했다. 


낮고 둥그스름한 산자락 아래에 다정하게 모여 있는 집들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온화해졌다. 손바닥을 펼치면 하늘에 닿을 듯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 잡은 가로수들의 가지와 푸릇푸릇 돋아나는 잎들이 그 어떤 초록보다도 싱그러웠다. 가지 끝에 매달린 여린 잎과 하늘을 향해 자라난 나뭇가지와 저 멀리 보이는 부산 앞바다와 사연 많은 지붕들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말 없는 대상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노라면 나 역시 그 풍경의 일부가 된 듯해서 걷는 다리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눈을 감고 산복도로 풍경을 떠올리니 날뛰던 감정이 차츰 가라앉았다.


나는 되도록이면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는데 아마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듯했다. 자꾸 말을 하다 보면 실수를 하고 그런 나를 잘 용납하지 못한다. 상담실에 앉아서 내 안의 완벽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임상심리사는 연거푸 내게 물었다. 


"능력이 뛰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빚어진 완벽주의가 아니라 구멍이 나면 안 된다, 실수를 하면 안 된다, 그런 완벽주의인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살면서 어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툴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만나서 말하는 상황이 아닌데.


단톡방을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망치는 걸까? 부끄럽고 민망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쳤다는 기분에 심난해져서 그냥 회피하고 싶은 걸까? 어쩌면 나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이런 감정을 거세하며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에서 잘못한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나를 위한 행동이다. 상대방도 내게 실수할 수 있으니 상처받기 싫어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여럿 모인 자리를 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한다. 그래서 내게 모든 만남은 어렵다. 그 누구도 서툴러 내게 상처 입히지 않기를, 내가 서툴러 상대방에게 상처주기 않기를 바란다. 


왜 이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 나는 잘 안다. 과거는 무지 힘이 세지만 어쨌든 나는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단톡방을 탈출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좀 더 견뎌보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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