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나를 불렀다.
"엄마, 나 쉬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벽 4시였다.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보니 베개, 이불, 깔개까지 모조리 젖어 있었다. 밤에 쉬를 하고 싶으면 꼭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던 녀석인지라 방수요 따위는 진작 치워버렸다.
방수요가 있었다면 깔개까지 젖지 않았을 텐데. 내 성급함을 탓해본들 어쩔 수 없었다.
우선 녀석을 대충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젖은 이불들을 몽땅 걷어냈다. 내일 아침에 세탁기를 2~3번 돌려야 할 판국이었다. 너무 졸렸기 때문에 새 이불을 대충 깔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며칠 뒤, 남편이 돌아온 주말이었다.
나는 이야기했다.
"전혀 화가 나지 않았어. 예전 같으면 미친 듯이 화를 냈을 거야. 기억나? 불과 몇 개월 전이야. 그때 둘째가 놀다가 옷에 쉬를 했을 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냈어. 새 물티슈를 뜯어서 바닥에 마구 던져버렸어. 바닥에 물티슈가 잔뜩 쌓였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어.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니까. 이상하지? 아마 약의 힘인가 봐."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남편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뭐가?"
"약의 힘이 아니야. 자기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저 잊고 있었을 뿐이지."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저릿했다.
나는 무엇을 잊고 있었던 걸까?
가끔 예전 사진을 꺼내보면 사진 속의 '나'는 정말 낯설었다. 생에 대한 열정과 미래에 대한 담대한 희망 따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충분히 즐기고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일에 짜증을 내고 화를 냈을까?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일어섰을까?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우울증을 겪으면서 나의 진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남편은 여전히 기억했다.
이상하지만 남편의 말은 나를 위로했다.
미운 모습이든 고운 모습이든 다른 사람이 나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나의 진짜 얼굴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