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뇌가 고장 난 건가요?

내 안의 완벽주의

by 키키 리리

"뇌가 고장 난 건가요?"

내가 묻자, 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고장 난 뇌를 가지고 산다는 걸 의사의 입을 통해 확인받자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난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대신 더 이상 변하고 싶은 마음도, 달라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더미처럼 정리되지 않고 이리저리 뒤섞인 채로, 뒤죽박죽인 채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엉망진창인 채로 사는 게 어때서?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게 나였다.


"음, 제가 부족하거나 잘못한 점은 엄청 크게 느끼고요 잘한 일은 잘 안 느껴져요. 늘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죠. 그 생각에 짓눌릴 때면 모든 것이 납작해져서 토하고 싶어요. 요샌 거의 매일 토해요."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문장만 빼고는. 조금 줄여서 이야기했다. 일주일에 2~3번만 토한다고 말이다. 요샌 아이스크림 하나만 먹어도 토한다. 물론 매 끼니마다 토하지는 않는다. 이번주는 3일 연속으로 게워냈다.


"자부심을 가져요."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리리씨가 쓴 책 있잖아요. 대기 중인 환자분들이 읽고 종종 이야기해 줘요. 공감을 많이 한다고요."

병원 대기실엔 책이 여러 권이 비치되어 있는데 그중엔 내가 독립출판으로 펴낸 책 <세상엔 기쁨이 많다>도 있다.

"아마 환자가 아니라면 공감하지 못할 내용이 많아요. 예전에 공모전 면접 심사 때 심사위원들이 그리 말한 것도 공감하지 못해서 그럴 거예요."


(당시 심사위원은 내 글이 장소에 매몰되어 있으며, 어딜 가는 게 중요한 점이 아니라고 말했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우울증 환자인 내가 직접 장소를 검색해서 낯선 곳을 걷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그 일을 난 했고 그 경험을 글로 썼지만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공모전에 낸 글은 내가 만든 브런치 북 '우울이 걸을 수 있다면'이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내가 만든 브런치 북 가운데 가장 애정하는 책이다.)


나는 그가 나를 위로해주려고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불행히도 그 순간, 나는 그가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지 의심했고, 그의 진심을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났다. 무기력하게 앉아서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잘났다.' 하며 잘난 점도 별로 없으면서 큰소리치고 살잖아요. 그런 사람이 더 많아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사람들도 뇌가 고장 난 걸까? 그에게 묻지 못했지만 답을 알필요는 없었다. 다 자기 멋대로 사니까. 나는 조금 우울한 채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파묻혔다.




곧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사는 게 늘 버거워요. 즐거운 일도 없고, 즐겁고 싶지도 않아요. 죽고 싶지 않지만 항상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해요. 사라지고 싶어요."


"어떤 점이 버거워요?"


"다음 주에 서울로 여행을 가요. 이 추위에 말이죠. 여행 계획을 짜는데 모든 것이 아이들 위주예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롯데월드, 자연사박물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공연 등등. 근데 모든 게 다 걱정이에요. 특히 공연은 2시간짜리인데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긴 하지만 둘째 녀석이 잘 볼 수 있을까? 계속 걱정해요.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인데 그나마 통로 쪽에 자리를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덜 끼치겠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미리 대책 같은 거 안 세웠는데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이미 대책을 다 세우신 것 같은데요. 통로 쪽에 자리 잡은 거며, 쉬는 시간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미리 계획을 세우지 마세요. 모든 순간을 다 통제할 수는 없어요. 강박적으로 그 상황에 매달리면 더 힘들어져요. 그러니 닥치면 그때 해결해요."


"음, 오늘만 살라는 말씀이죠?"


나는 뛰어난 환자가 되어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순간, 나처럼 똑똑한 환자만 만나면 그가 좀 덜 힘들겠다는 웃기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기적인 동기를 가져요.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맞추지 말고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다든지, 아이들이 싫어하겠지만 내가 가고 싶은 장소 하나쯤 끼워 넣는다든지 말이에요."


"네. 알겠어요."


이미 계획을 다 세운 상황이고 여행이 길지 않아서 바꾸긴 힘들지만 찬찬히 조언을 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그가 해준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특히 토하고 싶을 때는 조금씩 참아보라고, 30분 가량 참아보라는 말을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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