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완벽주의
한 달 만에 그를 만났다. 짧아진 헤어스타일 때문에 한층 어려 보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나요?" 그가 물었다.
난 집에서 병원으로 오는 동안,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올렸다. 심지어 말할 순서도 정해놓았다. 이러면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막힘없이 말했다. 불안, 걱정, 불면, 손 떨림, 호흡곤란, 가슴 통증, 두통 이런 단어가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그는 다시 물었다.
"최근 충격받은 일이 있나요?"
"아니요. 없어요."
"언제부터 밤에 여러 번 깼죠?"
"한 달 전부터요. 아마 저녁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것 같아요."
그가 컴퓨터 화면을 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약은 예전부터 먹었어요."
"아, 그렇군요." 나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잠시 당황했지만, 머릿속을 데굴데굴 굴려서 답을 찾았다.
나는 그에게 몇 가지 고민을 털어놓았다. 복직이 다가오자 미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다 하려면 너무 많다, 원격수업 준비부터 교과서 공부, 학습지 만들기까지. 게다가 시댁에서 열리는 비정기적인 행사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 가야 할 것 같지만 가고 싶지 않다, 명절과 시부모님 생신, 어버이날 외에는 가지 않기로 했는데 갑작스러운 모임이 생길 대마다 내 안의 착한 아이가 소리치고 있다. "넌 가야 해."라고.
"기억해요. 대책 없이, 대충, 나쁜 아이."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정말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이 맞아?
"네? 대책 없이 대충 살라고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나쁜 아이도 기억해요."
나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의도로 이런 처방을 내렸는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고 회로를 다시 수정해야만 했다.
대책 없이, 대충 사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분명 홧김에 뭔가를 저지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일이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준비하기란 불가능하다. 난 불가능한 일을 현실화시키려고 기를 쓰고 노력한다. 심지어 의사와의 진료 때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순서까지 정해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인간이다. 이런 내 노력이 때론 숨 막히게 느껴진다. 나를 짓누르고, 아프게 만든다. 철저히 계획을 세워서 완벽하게 살려는 태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계획으로 꽉 짜인 틀을 벗어나면 정말 자유로운 삶이 펼쳐질까? 대충 살아도, 대책 없이 살아도 삶이 어떻게든 굴러갈까?
카렌은 아프리카에서 부시벅 종류의 어린 영양 한 마리를 키운다. 이름이 룰루인 이 영양은 시간이 지나자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사랑도 하고 싶다. 그때 카렌은 이렇게 생각했다.
오, 룰루, 네가 놀랄 만큼 강하고 네 키보다 높이 뛸 수 있다는 걸 안다. 넌 지금 우리에게 격분해 있고 우리가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거야. 사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린 죽은 목숨이겠지. 넌 우리가 네가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장애물을 쌓아 놨다고 여기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란다. 우리가 어찌 높이뛰기 명수인 너에게 그런 장애물을 쌓을 수 있겠니? 우리는 아무런 장애물을 쌓지 않았단다. 룰루, 위대한 힘도 네 안에 있고 장애물 또한 네 안에 있단다. 다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란다.
- 카렌 블릭센 『아웃 오브 아프리카』, 열린책들, 민승남 옮김, 2008년, 71쪽
난 룰루가 되어 생각했다.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결국 내가 쌓은 것이다. 마음을 바꾸면 된다. 의사의 조언대로 대충, 되는대로, 완벽하지 않게, 대책 없이, 나쁜 아이로 살면 된다. 집을 벗어나 초원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마음의 자유를.
결국 룰루는 장애물을 넘어 초원으로 달려간다. 아무런 울타리도, 벽도 없는 곳. 실컷 뛰어놀고, 맘껏 쉴 수 있는 곳. 룰루는 그곳에서 수컷 부시벅을 만나 결혼을 했고, 새끼도 낳았다. 가끔 인간 세상이 그리워 집 근처로 다가왔지만 결코 집으로 돌아와서 살지는 않았다. 초원이 룰루의 집이었고, 그곳에 가족이 있었다.
나도 룰루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무척 쉬운 일이지만 나에겐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그 무엇도 미리 걱정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은 채, 온전히 현재에 몸을 맡기고 살기. 다른 누군가도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서 '착한 아이'로 살기. 나에게만 착한 아이.
눈을 감으니 푸른 초원이 보이고, 나는 룰루처럼 신나게 뛰어다닌다.
눈을 떠도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