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즐거운 나는 내가 아니에요

과도한 죄책감과 자책

by 키키 리리

"요즘 글이 안 써져요."

그는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바라보았다.

"우울할 때는 글이 술술 나오거든요. 우울을 연료 삼아서 글을 마구 써대요. 활활 타오르는 장작 같아요."

나는 마치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두 손으로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탁- 줄이 끊긴 것처럼 팔을 떨어뜨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의사 앞에 앉아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을 때면 나는 신체 여러 부분을 종종 움직인다.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반쯤 굽히기도 하고,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과장된 몸짓을 선보인다. 눈을 질끈 감거나 몸을 배배 꼬기도 한다. 때론 의사를 바라보다가 그의 등 뒤 어딘가를 응시하기도 하며, 간절한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본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의아함이 든다.


그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어떻게 행동을 해도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지금은..."

나는 몸을 잔뜩 움츠린 다음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 다 꺼져버렸어요."


"주로 우울할 때 글을 쓰나요?"

"네."
"다른 내용으로도 글을 쓰나요?"

"아니요, 거의 안 써요."

"혹시 우울하지 않을 때 쓴 글이 마음에 안 들었나요?"

"... 맞아요. 늘 마음에 안 들죠. 내가 아닌 것 같아요. 평온하거나 즐거운 상태의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아요. 이래도 될까, 싶은 마음. 죄책감을 느껴요."


그가 싱긋 웃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나는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울하지 않을 때의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그런 상태에서 쓴 글도 익숙하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들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글조차 내 모습임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 다른 분야의 글을 한 번 써봐요. 물론 우울할 때 글을 쓰면 마음을 풀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죠. 그렇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건 의미 있어요. 처음은 쉽지 않을 거예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잘할 수 없을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잘 쓸 필요도 없고, 잘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상하게도 글만큼은 포기하기 싫었다. 내가 '포기'라는 단어를 갖다 쓸 수 있을 만큼 뭔가 대단한 인간은 아니지만.




나는 병원을 나오면서 계속 생각했다. 우울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쓸 수 있을까? 평온하거나 즐거운 상태에서, 때론 행복하거나 인생이 아무 일 없이 흘러간다고 착각할 만큼 너그러워졌거나 이쯤이면 꽤 잘 살아왔다고 믿거나, 앞서 언급한 그 모든 순간 어디쯤 서 있을 때, 그럴 때.


내게 편한 상태는 역설적이게도 우울하고 불안한 상태이다. 마음이 평온하거나 아무 걱정이 없을 때는 마치 내가 무엇을 잘못한 사람처럼 초조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무채색 사진들을 찾아보고, 밝음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음악을 들으며 사라지기 직전인 내면의 우울을 벅벅 긁어모으며 앉았다. 우울이 사라지니 불안하고 우울하지 않으니 불안하다. 익숙한 것은 그만큼 힘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편해서 그럴 거다. 내 몸에 잘 맞는 옷처럼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결말을 뻔히 아는 영화처럼 안심이 되어서.


중요한 것은 글이 아니었다. 우울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내 상태를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즐겁고 명랑하며 쾌활한 나, 부드럽고 화를 내지 않으며 평온한 나, 한껏 너그러워져서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나. 그런 내가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부터 해야 했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상태에서 쓴 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이전 09화9. 내 안에 착한 아이가 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