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자책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조금씩 생긴 변화

by 키키 리리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나는 내 근황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다. 무기력해서 틈만 나면 자는 것과 구토 증상은 좀 덜 하지만 여전하다고. 의사 선생님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하루에 얼마나 자나요?"

"음, 밤에는 9시간, 낮에는 3시간 정도요."

"엄청 많이 자네요."

"그렇죠. 거의 겨울잠을 자는 수준이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얼마 전 설 명절 때요, 어머님이 저에게 화를 엄청 많이 내셨어요. 돌아서서 눈물을 찔끔 흘렸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는 그에게 대강 설명했다.


"좀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어머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를 내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마음이 좀 편안해지더라고요."

"예전보다 여유가 많이 생겼군요."

"맞아요. 예전 같으면 속상한 마음에 계속 우울해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어요."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마 도움이 조금 되었을 거예요. 이유 없이 맞는 것보단 이유를 아는 게 덜 아프죠. 물론 내 감정이 우선인 건 아시죠?"

"네. 어머님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느낀 억울하고 속상한 감정도 그대로 인정해줘야 하죠."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상대방이 나에게 화를 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혹시 자책은 안 하셨나요?"

"전혀요."

그가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자책도 전혀 안 했고요, 어머님이 화를 내실 때도 그래, 그렇구나-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생각하려고 노력했어요. 제게 서운하거나 제가 마음에 안 드셔도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죠."

"잘하고 계시군요."


나는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실제로 어머님이 이제껏 그렇게 화를 내신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충격이 컸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부분과 아닌 부분을 구분하려고 애썼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얼마 전 학교에서 전화가 오더라고요. 아직 복직 전인데 신학기 업무로 OO을 하면 어떻겠냐고 말이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전화드려서 못하겠다고 그 대신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이런 소릴 예전엔 전혀 못 했거든요. 상대방에게 폐를 끼친다고 여겼고 우울증을 앓는 걸 공개할 용기가 없었어요. 이제는 그런 일 따윈 상관 안 해요. 학교 일이 힘든데 참고 견디다가 병이 재발한 경험이 있어서요."


"맞아요. 좀 이기적으로 살아도 됩니다. 제가 여러 환자 분을 만나보니 오히려 이타적인 분들이 병원에 많이 오시더라고요. 참을 필요도 없고요, 조직은 내가 아니라도 잘 굴러갑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은유 작가의 <<크게 그린 사람>> 인터뷰집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이영문 국립건강센터장의 말이었는데 그는 스트레스를 잘 쌓아두지 않는다고 했다. 지나친 성실감과 책임감은 우리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에 조직과 갈등이 있다면 개인의 욕망을 따라가라고 말했다. 나 없이도 조직은 굴러간다고 말이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면 내가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수년 전의 나와 비교해 보니 달라진 나를 꽤 잘 살펴볼 수 있었다. 3월에 복직하면 적어도 예전만큼 나를 갉아먹으면서까지 일할 생각은 없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잘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학생들과 잘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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