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마 1

by 키키 리리

방파제에 걸터앉아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갯강구를 쳐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게 돌멩이를 던졌다. 돌은 정확히 내 오른쪽 머리에 맞은 뒤 따개비들이 무수히 붙어 있는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별로 아프진 않았으나 거의 반사적으로 “아, 씨. 짜증 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주먹을 꼭 쥔 채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샐쭉하게 내민 여자애 한 명이 서 있었다.


“넌 뭐고?” 그 애는 내게 도전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럼 넌 뭔데?” 나는 응수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나는 한영준이다. 돌은 왜 던졌노?”


“그래? 근데 너, 여기 처음이가? 어디 사는데?”


그 애는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또 다른 질문을 퍼부었다.


“엊그제 이사 왔다. 저기 저 집 보이나?”


나는 몸을 돌려 산 중턱에 위치한 회색 슬레이트 지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몇 살이고?”


“내년에 국민학교 드간다.”


“내는 난희다. 앞으로 같이 놀자.”


그 애는 환하게 웃으며 검게 그을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애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고, 찐득한 땀내를 폴폴 풍기는 아이였다.


나는 그 애가 꽤 마음에 들었는데 대범한대다가 나처럼 친구가 간절한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꽤 여러 날을 같이 어울려 다녔다. 난희가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죽은 채로 발견되기 전까지. 이것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난희와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가끔 난희가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서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 보지만 곧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닫게 된다. 무수한 가정을 늘어놓더라도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 직장 문제로 부산에서 울산으로 이사 온 우리 가족은 한적한 어촌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간혹 고래가 나타난다는 곳이었지만 정확한 마을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젖먹이 어린 남동생을 건사하느라 쭈글쭈글해져버린 엄마가 입버릇처럼 “고달퍼라, 고달퍼라.”를 중얼거리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가 어디를 쏘다니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초여름이었는데, 몹시 더웠고 동생의 접힌 살집 사이로 빨간 땀띠들이 오돌토돌 올라와서 가뜩이나 근심 걱정이 많은 엄마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방파제로 둘러싸인 바닷가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 중반에 자리해서 마당에 서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기 잡는 배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배들이 선착장으로 들어올 때면 갈매기들이 끈질기게 따라오곤 했다.


주인집 영감은 엄청난 구두쇠였는데 1부에 130원하는 신문 한 장도 허투루 버리는 일이 없었다. 마당 구석에 자리한 변소에 들어가면 할아버지가 곱게 잘라 놓은 신문지가 고리에 꿰어져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꼭 한 마디씩 잔소리를 하곤 했다. “물 아껴 써라. 볼일 보고 나오면 꼭 불 꺼라. 방파제 아래로 내려가지 마라. 엄마 잘 도와드려라.” 물론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난희는 바닷가 바로 앞에 위치한 빨간 지붕 집 손녀였다. 부모는 모두 고기잡이 배를 탄다고 했다. 난희를 돌보는 할머니는 내게 친절하게 대해줬는데, 아마 우리 둘이 잘 놀아서 그런 듯했다. 우리는 주로 방파제 위나 바닷가에서 놀았다. 과자 한 봉지를 사다가 길 위에 뿌려놓으면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간혹 방파제 아래로 내려가 작은 게들을 잡은 뒤 다리를 하나씩 툭툭 잡아떼거나 바짝 마른 불가사리를 주워 멀리 던지곤 했다. 그 짓도 지루해지면 인근 국민학교에 몰래 들어가 수업 중인 교실 유리창을 나뭇가지로 때려서 방해를 했고, 집에서 들고 온 크레파스로 학교 외벽에 낙서를 했다.


아침부터 난희와 논 날이면 그 애 집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었는데, 그 애 할머니가 “아버지는 뭐하시노? 가족관계는 어찌 되노? 난희랑 뭐하고 노노?” 이렇게 말하며 자꾸 캐묻는 바람에 난처해진 적도 있었다. 때때로 난희 할머니는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부추전이나 직접 갈았다고 강조하는 시원한 콩물 따위를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그런 날은 엄마가 짜증을 덜 내서 늦게까지 밖에서 놀아도 괜찮았다.


7월이 되자 날씨가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워졌다. 햇볕은 살갗을 모조리 태울 정도로 강렬해서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집 안에서 먹고 자는 것 외에 그나마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은 맹렬히 우는 어린 남동생의 볼을 엄마 몰래 꼬집어 더 세차게 울게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이 일도 동생 볼에 선명하게 남은 손톱자국으로 들통이 나서 엄마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뒤 끝이 나고 말았다.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온 몸을 뱀처럼 배배 꼬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