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키 리리 Nov 24. 2023

멋지게 오독하기 1

황선우, 김혼비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며칠 전, 학기말 전체 가정통신문을 작성하는데 제가 이런 말을 쓰고 앉았더라고요.


(앞부분 생략) 학부모님, 3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유가 많은 시기입니다. 학생들이 알차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최선을 다해 지도하겠습니다...


지난주 금요일부턴 생활기록부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일명 쫑알쫑알)을 쓰고 있는데 또 이런 말을 적고 있더라고요.


(앞부분 생략) 자기 주도학습력이 뛰어나며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함...


눈치채셨나요?


앗, 당황한 표정을 지으시는군요. "뭘 말인가요?"라고 물으시니 알려드려요. 박스 안에 가둬놓은 문장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단어를 찾아보세요. ('앞부분 생략'은 정답이 아닙니다 -_-)







이젠 찾으셨나요?








최선을 다해... 최선을 다함...



맞아요.


'최선'이라는 단어를 자주 씁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최선을 다합니다. 물론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종용하지는 않지만 스스로에게는 무척 엄격하게 적용해요. 그래서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런 제가 번아웃으로 우울증이 악화되어 죽다 살아난 적이 있어요.


학교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를 발견한 순간, 나를 위한 책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읽고 싶어서 구입 희망도서로 신청했습니다. 새 책이 도착한 날, 사서 선생님께서 "선생님이 희망하신 책이 신간코너에 있으니 빨리 오세요."라고 친절히 안내해 줬어요.





이 책은 황선우 작가와 김혼비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글입니다. 번아웃과 과로에 시달리다가 건망증이 생기고, 장염에 걸려서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해지거나 젖은 미역처럼 널브러져 있을 때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해 주고 유머를 던지는 내용이 펼쳐집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이상한 지점에서 위로를 받았어요. 과로와 번아웃이 시달리는 직장인이 나 혼자뿐만이 아니구나, 힘든 나에게 웃음과 용기를 주는구나,라는 뻔한 감상문을 쓰려는 게 아니에요. 이 책을 펼치자마자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서로 망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잠깐 만났던 대선 다음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그날 저녁 온라인으로 목탁을 덜컥 주문했어요. (15~16쪽)


느껴지시나요? 모르시겠다고요?


그럼 다음 문장도 읽어보세요.


국가애도기간이라는 선포가 애도의 다양한 형태를 지워버리고, 마치 애도에 정해진 시간과 끝점이 있기라도 한 듯 애도의 시간성을 한정해 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요. 뚜렷한 책임소재가 있는 일을 그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라는 몽롱한 말로 뭉개버리려는 듯 국민 모두에게 애도를 강제함으로써 진정한 책임을 전체에게로 분산하고, 자신들에게 제기되는 애도의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도요. (102쪽)


급기야 다음 문장에서 빵 터졌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몇 년 만에 오해도 풀고, 오신 분들로부터 "세상의 무해한 술꾼들을 위해 음주 에세이 더 써주세요!"라는 덕담도 들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쓸데없이 용산에 살면서 무속만큼이나 술을 사랑하시는 분이 술꾼의 이미지를 땅바닥에 처박아버려서 이제 글렀어요"라고 대답했지만요). (182쪽)




그렇습니다. 전 작년 대선 결과를 듣고 불면의 밤을 보냈어요. 물론 코로나에 걸려서 골골댄 까닭도 있지만요. 이태원 참사 직후 국가애도기간이란 걸 정하는 정부를 이해하기 힘들었고요, 청와대를 놔두고 용산으로 이전한 분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어요.


저는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았어요. 그동안 그 누군가를 '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글을 못 쓰는 나,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마음이 좁은 나, 카리스마와 유머를 동시에 겸비한 동료를 부러워하는 찌질한 나. 저는 '나'만 미워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를 미워하는 만큼 강렬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어요. 아니, 제가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굳세게 그분을 미워했다니까요. 게다가 작가 김혼비 씨와 제가 어떤 부분에서는 생각이 일치하다니!!!! 갑자기 김혼비 씨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알죠? 멋지면 다 언니라는 거!


책을 읽는 내내 깨알같이 나오는 김혼비 씨의 발언(위에 인용한 문장들과 같은 맥락으로 쓰인 문장)을 다람쥐가 두 볼 가득 도토리를 집어넣듯이 제 볼 안에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으며 야금야금 씹어 삼켰어요. 그러자 몸 안에 피가 돌고 생기가 돌고 뺨에 발그래지면서 물에 불린 미역처럼 퉁퉁 불어난 제 몸뚱이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긴장으로 딱딱했던 어깨가 말랑말랑해지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책을 이런 식으로 오독하고 엉뚱하게 읽는다는 것은 작가와 출판사를 모욕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체 내용을 보지 않고 부분만 조각내서 씹어먹는 것을요. 분명한 점은 제가 '이런 식'으로 읽었지만,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는 책이 주는 효용(공감과 위로)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서평을 쓸 것도 아니고, 이 책을 언어 영역 지문에서 만날 것도 아니며, 단순히 심신안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적이니 어떤 식으로 읽든 제 맘 아니겠습니까? 깔깔깔깔-


반듯하고 바른 길로만 살았던 저는 자주 일탈을 꿈꿉니다. 때맞춰 대학을 졸업하고(제 동기들보다 겨우 한 학기 늦었지만)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애 둘 낳아 기르면서 책을 이상한 방식으로 읽는 게 뭐가 그리 큰 일탈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일단 저에게는 일탈맞고요, 무엇보다도 즐겁습니다.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제가 언젠가는 멋지게 오독하기라는 장르를 개척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최선을 다해 등산했던 어느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