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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Jan 11. 2024

34. 일을 못하는 척 좀 해보세요

"지난번에 처방받은 약을 먹고 토하는 횟수가 줄었어요. 일주일에 5번 이상 토했다면 지금은 2~3회 정도로 줄었어요. 먹는 양은 변함없지만 폭식을 하지 않아요. 신기해요."


의사는 이 말을 듣자 반색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키보드 위를 움직이며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먹고 토하는 횟수가 절반 정도 줄었네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달에 파피온 서방정을 처방받았다. 이 약을 복용한 뒤 폭식하는 습관이 사라졌다. 변화는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입 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는데 이제는 오른팔에 쇳덩어리가 매달린 것처럼 젓가락을 천천히 움직인다. 


그는 체중 변화와 수면 시간, 운동 여부를 확인했다. 누군가 내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 양상을 체크하는 일련의 과정이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다. 물론 의사는 직업에서 파생되는 업무의 일환으로 질문했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학교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소모품 같다는 느낄 때가 많았다. 그 누구도 소모품의 상태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어쨌든 소모품은 배터리가 있는 동안에는 잘 돌아가니까. 하지만 나는 종종 배터리가 바닥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굴렸고 그러다 보면 짜증과 분노가 치솟았다. 


의사 앞에 앉아서 체중 변화는 어떠했고, 잠은 얼마나 잤고, 운동은 하루에 어느 정도 한다는 말을 하면서 '아, 내가 소모될 때까지 막살면 안 되겠구나, 건강을 챙기며 살아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챙김을 받아서 좋았고,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깨달아서 반가웠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교감 선생님이 부장 제의를 하셨는데 제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교감 선생님이 엄청 기뻐하셨어요."


1월 2일에 학교에 갔다가 교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게 3학년 부장을 제의했다. 그는 내 능력을 높이 샀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따지기 시작했다. 국어과 교사가 감원되면서 2024학년도에 수업시수가 많이 늘어났다. 매일 4시간을 서서 말해야 한다. 게다가 담임을 하면서 조종례, 급식지도, 청소지도를 하고 그 사이에 업무까지 해내려면 화장실 갈 틈이 없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게다가 업무분장을 새로 하면서 3학년 부장이 해야 할 일이 작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내가 감당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물론 하겠지만 나를 갈아가면서 할 게 뻔했다.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일할 게 명확했다. 배터리가 빨리 닳겠지. 나는 우울증이 더욱 심해질까 봐 걱정했다. 실제로 몇 년 전엔 이렇게 일해서 우울증이 재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덜컥 승낙한 내가 바보 멍청이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는 힘들 테니 수업 시수나 업무를 조금 조정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을 텐데 앞뒤 재지 않고 "예."라고 말한 나를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대다가 호흡곤란이 왔고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두근거렸으며 밤에 때마다 잠옷이 젖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어쩌면 좋을까요? 할 자신이 없어요."


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절하면 교감 선생님이 나를 미워할까 봐 그것도 걱정이 돼요. 3학년 부장 대신 더 험한 일을 맡길까 봐 잠을 잘 못 자겠어요."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다. 잠잠하던 공황 증세가 도졌고, 불안증이 더욱 심해졌다. 


그는 조용히 내게 물었다.


"교감 선생님은 언제 다른 학교로 가시죠?"


"1학기까지만 하고 다른 학교로 가요."


"그럼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6개월은 금방 갑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객관적인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의사는 내게 소견서를 써주었다. 


진료실을 나오기 직전 그는 말했다.


"일을 못하는 척 좀 해보세요. 실수도 하고 펑크도 내고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게는 실행하기 너무 힘든 조언이었다. 


내가 일을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부장 제의도 들어오지 않았을 테도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




집에 돌아와 소견서를 펼쳐보았다.


병명에 상세불명의 우울에피소드, 공황장애, 사회공포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문서로 확인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하지만 나는 소견서를 꼭 쥐고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이 소견서만 있으니 거절할 명분이 생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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