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병원에 대기 환자가 많았다. 진료 예약시간이 11시였지만 11시 20분이 되어서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오늘 환자분이 굉장히 많네요."
"명절 전 주말이라서 많아요."
"힘드시겠어요."
"그래서 어제는 공황이 오더라고요."
나는 짠한 마음이 들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일 아픈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듣고 약을 처방하는 그의 일이 고되다고 느꼈다.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요즘 기분이 상쾌하고 우울하지도 않아요. 심지어 행복하다고 느껴요."
의사는 내 말을 듣고 놀라워했다.
"왜 그렇죠?"
"지난번에 교감 선생님이 부장 제의를 하셨는데 심사숙고 끝에 거절했어요. 선생님이 써주신 소견서가 큰 힘이 되었어요. 거절한 이후로 속이 후련하고 기분도 좋아요."
나는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평소보다 조금 들떴는데 어쩌면 약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가 큰 탓이었다.
"다만 먹고 토하는 습관은 못 고쳤어요. 이번주에는 무려 다섯 번이나 토했어요."
"체중에 대한 부담이 아직 있군요."
"맞아요. 아빌리파이정을 먹고 무려 6킬로가 넘게 쪘는데 사실 이게 약 때문인지 많이 먹어서인지 나잇살 때문인지 운동 부족인지 헷갈리긴 해요."
"파피온을 먹고 토하는 횟수가 줄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런데 요즘엔 천천히 많이 먹고 다 토해버려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나요?"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있긴 있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아무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학교 일이 힘들 것 같아요. 교사 1명이 감원되는 바람에 제 수업시수가 학교에서 제일 많아졌어요."
나는 눈앞에 캄캄했다. 목은 아픈 건 둘째치고 수업에 쏟을 에너지가 내게 충분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수업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마세요."
나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아마 그렇게 하긴 힘들어 보이긴 합니다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수업에 온 에너지를 다 쏟아요. 학생들은 제 수업이 재미있다고 말하거든요. 제가 지루한 걸 견디지 못해요. 그래서 어떻게든 즐겁게 수업을 하려고 애를 쓰죠. 그러면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라 집에 와서는 자식들한테 짜증을 내죠."
우울증이 심했을 때, 내 상태를 돌아보면 항상 그랬다. 모든 에너지를 학교에 다 써버려 방전이 되면 말 한마디 할 힘도 남아있질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육아와 집안일이 남아 있으니 짜증과 화가 날 수밖에.
갑자기 내 새끼들이 안쓰러웠다.
"절전모드를 잘 유지하세요. 롱런하기 위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20년 가까이 일을 더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지내다간 롱런은커녕 걷다가 나자빠지게 생겼다. 어떻게 해야 에너지를 잘 분산시켜 일할 수 있을까? 내겐 너무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최근 내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눴다. 기분이 좋고 우울하지도 않고 심지어 행복하다고 느끼니 약을 줄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음은 많이 좋아졌는데 몸은 아직 마음의 상태를 못 따라가네요."
"토하는 것 때문에 그렇죠?"
"맞아요. 일단 지난번과 똑같이 약을 처방할게요. 그러면 한 달 뒤에 뵐까요?"
나는 조용히 진료실을 나왔다.
체중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고 에너지를 잘 분산시키는 것.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사실 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기.
운동하기.
수업에 온 힘을 다 쏟지 않기.
지행일치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줄이야. 갑갑한 마음을 안은 채 대기실에 앉아 한 달 치 약이 나오길 기다렸다. 약 봉투는 지난 날과 똑같고 약도 똑같다. 이렇게 내 우울증은 오늘도 생명력(!)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