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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Jun 16. 2024

36. 난 이제 과거의 내가 아니야

토요일 오전, 첫 환자였다. 나는 노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2019년부터 이 병원을 다녔으니, 60번은 훌쩍 넘었으려나? 의사가 첫인사로 저 질문을 건네면 나는 언제나 처음 듣는 사람처럼 심장이 떨리고 긴장이 된다. 제한된 시간 안에 내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다행히 근래에 들어서는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일상을 이야기했다. 어차피 구구절절한 사연의 핵심은 힘듦과 고됨 혹은 소진 정도로 압축될 수 있으니.


"지난날에 약을 줄이자마자 일일 팡팡 터졌어요. 학급에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고, 학부모님의 민원 전화를 받고 멘탈이 나가기도 했으며, 맡은 업무가 잘 진행되지 않아 선생님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요."


"아, 그렇군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교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던 적도 있고요, 협조를 거부하는 선생님과 한 판 붙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물론 참았지요. 그랬다가는 미친년 소리를 들을 테니까요."


"잘하셨네요."


사실 잘한 일인지는 모른다. 전자는 참길 잘했지만 후자는 정말 들이받고 싶었으니까. 예전에는 이렇게 부당한 일을 마주하거나 내게 억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피하거나 참았는데 요즘은 그게 힘들다. 사이코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노발대발하고 싶다. 


그래서 부서 부장님께 하소연을 했다. 


"제 업무가 기피 업무 중 하나인데 부장님이 전혀 신경을 안 써요. 저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좌충우돌하는데 늘 혼자 한다는 생각에 외롭기도 했지요. 모든 선생님들이 협조해 주셔야 제 업무가 진행되는데 부장님은 관심이 없지, 어떤 선생님들은 협조가 힘들다고 하지, 이러니 미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부장님을 찾아갔어요. 힘든 점을 다 이야기했어요. 부장님은 놀란 얼굴이었지만 잘 들어주셨어요."


"그 뒤로 무슨 변화가 생겼나요?"


"부장님이 업무 담당자가 부탁하면 협조 잘해달라고 전 선생님들께 메시지를 날리셨더라고요. 그러니 분위기가 조금 바뀌긴 했어요."


"다행이네요. 예전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참았겠죠. 혼자 다 짊어지려고 했을 테고 그러다가 우울증이 더 악화되었을 테고..."


나는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았다. 비쩍 말라서 휘청거리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주말에도 나가서 일했고, 늘 남아서 일했고, 묵묵히 일 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고, 부당해도 참았고,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은 잘 먹고 살집도 제법 붙었다. 매일 운동을 한다. 목소리는 커졌고, 남들 눈치도 예전보다는 안 본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을 덜 쓴다. 남들이 욕하겠지만 힘들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잘하셨네요. 그 정도면 스트레스 관리를 잘하신 거예요."


"그렇죠? 저도 제가 달라졌다고 느껴요. 그리고 제가 근무교에서 수업 시수가 젤 많다고 했잖아요. 어떤 날은 8시간 근무 중에 6시간 수업할 때도 있어요. 진이 다 빠지죠. 하지만 교실에 들어가면 힘이 솟구쳐요. 학생들 앞에서는 신나게 날아다녀요."




어디서 이런 에너지가 솟는 걸까? 나는 나 자신이 감당이 안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우울증에서 조울증으로 뇌 체질이 바뀐 걸까?


"잠은 잘 자나요?"


"네, 하루에 7~8시간은 꼬박꼬박 잡니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새벽에 몇 번 깨기도 하지만요."


"잠을 안 자고 싶다거나 새로운 에너지가 막 샘솟고 그러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주말만 되면 물에 불린 미역처럼 침대에 철썩 달라붙어서 늘어져 잡니다."


"제가 수면 상황을 여쭤본 건요, 조증이 온 건가 싶어서요."


"우울증보다 조울증이 더 안 좋은가요?"


"아무래도 관리를 더 해야 할 필요는 있지요. 지금 먹고 있는 아빌리파이정이 그런 기복을 조절해 주니까 그 용량은 꼭 먹도록 해요. 아직 조울증이라고는 판정할 수는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약 용량을 더 늘려야 하나요? 지난달에 항우울제를 100mg에서 75mg으로 줄였잖아요. 그리고 일이 팡팡 터졌고, 짜증이 늘고, 잠을 좀 설치긴 했어요."


"음, 힘든 고비는 어느 정도 넘긴 것 같고요,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고 있으니 일단 유지해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학급에 사건이 터졌을 때 거기에 깊이 매몰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해결해려고 노력한 점과 힘든 점을 혼자 삭히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내가 생각해도 큰 변화이다. 


하지만 부당한 일에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려고 한 점이나 내 감정을 숨기지 않고 힘들면 힘들다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말한 점. 그리고 교실만 들어가면 샘솟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점은 이전과는 너무 다른 변화라서 사실 감당이 안 된다. 예전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게 조증에서 비롯된 점이 아니라 그냥 내가 건강해져서 생긴 변화라고 여겨도 될까? 수년간의 정신과 치료와 상담, 스스로 부딪히고 깨친 깨달음, 나이가 들면서 생긴 여유, 무엇보다 우울증이 극심했던 시기보다 무려 7kg나 살이 불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1시간씩 운동한 결과 덕분이라고 여겨도 될까?


나는 긍정적인 변화마저도 병으로 의심해야 하는 처지에 약간 의기소침해졌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약봉투를 가방에 집어넣고 씩씩하게 걸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샌드위치와 샐러드, 요구르트 주스와 김밥을 샀고, 서둘러 돌아가 가족과 함께 나눠먹었다. 아주 맛난 점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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