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니 어제 또다시 화를 내고 말았다. 사실 화가 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화를 낸 방식과 그 화를 처리하는 과정이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여유로운 일요일 점심이었다. 나는 식구들을 위해 김밥을 직접 싸고, 떡볶이까지 만들었다. 차려놓은 음식을 거의 다 먹고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비염이 있는 둘째였다. 공기가 바뀌거나 창문을 열어놓으면 어김없이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아직 김밥을 먹던 둘째가 재채기를 하자 녀석의 입 안에 있던 밥알이 첫째의 주위에 쏟아졌다.
난데없는 봉변에 첫째는 비명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내 귀를 날카롭게 자극했다. 갈퀴로 내 귀를 벅벅 긁는 것 같았다. 당장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폭발할 것 같았다.
징징거리는 울음소리는 내 불안을 더욱 가중시킨다. 평온하게 일상생활을 하다가 내 시선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 저런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나는 놀란 마음에 황급히 달려올 수밖에 없다. 엄청나게 큰일이 생기지 않고서야 저렇게 울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아주 작은 벌레를 보거나 동생과의 작은 다툼에도 혹은 마음에 드는 만화가 바로 나오지 않을 때도 저렇게 울었다.
청각이 몹시 예민한 나는 소음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첫째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제발 그렇게 울지 마!"
무서울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는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거칠게 정리했다. 싱크대에 거의 던지듯이 그릇을 몰아넣고는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느라 두 손을 꽉 쥐었다. 먹은 음식을 토하고 싶은 마음이 쉴 새 없이 몰려왔다.
남편이 상황을 설명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내가 설거지를 할까?" 하며 물었지만 나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에게 나의 이런 얼굴을 보여준 것이. 그리고 아이에게 미안했다.
첫째는 내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다가왔다. 식탁 위를 휴지로 닦으면서 내게 슬쩍 말을 걸었다. 나는 화를 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내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진짜 이유 말이다.
나는 첫째와 같은 나이 때 저렇게 징징거리면서 울어본 기억이 없다. 소리를 내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세상의 아픔이란 온통 나의 것인 양 울어보지 못했다. 아주 크고 처절하게,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울어야 부모가 재빨리 봐준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그렇게 울어야 동생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동생보다 먼저 자신의 말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내 예민한 청각도, 첫째의 징징거리는 듯한 특유의 울음소리도 아니었다.
나의 문제였다.
울지 않고 크는 아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나는 그랬다. 울지도 않고 춤도 추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린 시절의 나는 입을 다물고 무얼 했단 말인가-
난 울지 않고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지?
유치원과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지 않고 그 시절을 어떻게 통과했지?
조용하고 순응적인 아이는 부모를 편하게 할 진 몰라도 아이 자신은 아니다. 억압하고 표출하지 못한 감정들이 어디를 떠돌까?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몸집을 불리다가 결국 자신을 공격한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운다. 울음은 그들의 특권이다. 사소한 것이 맘에 들지 않을 때, 엄마가 자신을 봐주지 않을 때,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당연한 일을 나는 여전히 못 받아들였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 집 아이들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로 표현하거나 억울함과 슬픔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일이 다행스럽다. 엄마의 말에 무조건 '네'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일, 엄마의 잔소리에 투덜거리는 일, 엄마의 지시에 반항하는 일-
이 모든 일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내가 계속 같은 걸림돌에서 넘어지자 의사는 말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심리치료도 병행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 지금 당장 받지 않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늘 그렇듯 최종 선택은 나의 몫으로 남겨두고,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약간의 위로도 해준다.
사실 심리치료에 대한 이야기는 작년 말부터 계속했었다. 다만 내가 확신이 안 섰을 뿐. 직장 다닐 때는 휴직해서 받겠다고 말했고, 휴직해서는 코로나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서 말이다.
*대문 사진: Stephanie Harvey,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