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이 지켜주는 창작자의 작은 시작
아침부터 작은 긴장이 감돌았다. 아이가 볼펜을 들고 안방과 거실을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소파에서 한 작품활동의 흔적이 결국 제거되지 않은 탓에 생긴 염려였다.
"볼펜 써도 좋아, 하지만 스케치북에서 하는 거야."
단단히 주의를 주고 안방으로 가 다시 머리를 말렸다.
"엄마, 이리 와 보세요! 아기 가오리에 색칠했어요."
이번엔 가오리 인형에 볼펜 칠이 되었겠다고 생각하며 거실로 나갔다. 하지만 아이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스케치북 앞이었다. 스케치북 위에는 아이가 삐뚤빼뚤한 선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어디까지가 스케치고 어디서부터 채색인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처음엔 그저 장난스러운 낙서로 여겼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선들 사이에 내 새끼손톱만 한 그림이 있었다. 가오리처럼 보였다. 넓적한 몸통 아래로 짧지만, 삐죽 내려온 꼬리까지. 29개월 아기 작가의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머! 이거 누가 그린 거야?"
"내가!! 이렇게 볼펜으로 그렸거든요."
아이는 볼펜을 휘저으며 또랑또랑 대답했다. 그러고는 마치 아트페어에 참가한 작가처럼 그림에 대해 스토리텔링을 이어갔다. 아이는 그렇게 자신만의 상상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사실 이건 거의 우연에 가까운 결과라는 걸 안다. 어쩌면 동그라미를 그리려 했는데, 손이 가는 대로 뒀더니 만들어진 모양일지 모른다. 그래도 아이의 입을 통해 이름이 붙는 순간, 단순한 낙서는 한 마리 가오리가 되었다. 그 그림이 퍽 마음에 들어 사진까지 찍어두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하나의 작품 아닐까?
지난가을부터 아이는 말로도 종종 그림을 그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는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아이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더니 "노란 나비가 팔랑팔랑 뚝!"이라고 말했다. 노란 은행잎 하나가 테이블 위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것이 날개짓하는 나비로 보였던 것이다. 비가 오기 전 천둥이 치던 소리를 듣고 "하늘이 두근두근해요."라거나, 아빠의 뽀뽀 세례를 받고 "수염이 비처럼 내리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름 붙이고, 비유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일들 역시 아이의 작은 창작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언어와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모습은 놀랍고도 사랑스럽다. 창작이란 본래 이렇게 시작되는 것 아닐까? 처음부터 거창하거나 대단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특별한 시선이 담긴다. 모든 창작물은 그렇게 누군가의 애정 어린 관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소한 것에 웃는 순수함과 세상을 끝없이 탐구하는 호기심 그리고 계산 없는 사랑으로 말이다.
하지만 창작이 손쉬워지고 어디까지가 원작자의 것인지 그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최근 피부로 느꼈다. 사진과 함께 '지브리 스타일로 만들어줘'라는 한 줄의 프롬프트만 입력하면 나를 빼닮은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튀어나왔다. 전 세계 사람들이 챗지피티(ChatGPT)로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에 열광했다. 오픈 AI의 CEO는 이용자가 급증하자 "GPU가 녹아내리고 있다"라는 환희에 찬 푸념을 할 정도였다.
한편에서는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뒤따랐다. 지브리 특유의 색감, 선,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줬지만, 저작권법상 스타일이나 분위기 자체는 보호 대상이 아니다. 누가 봐도 지브리 애니메이션처럼 보이지만, AI가 만든 이 이미지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다. 지브리 작품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생성한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사랑한 많은 이들이 애정 어린 투영을 즐겼지만, 누군가에겐 오랜 시간 쌓아온 고유한 어떤 것이 순식간에 희미해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단순한 재미와 놀이로 소비되지만, 그 속에는 분명 누군가의 손끝에서 처음 태어난 창작의 시작점이 있다.
창작이 쉬워진 시대일수록, 원작자의 권리가 가려지는 순간도 잦아진다. 저작권법은 이러한 위험 속에서도 창작자의 권리만을 절대시하지 않는다. 이용자의 자유로운 창작 역시 소중하기에, 저작권법은 보호와 이용이 조화를 이루며 문화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보호받을 권리가 있기에 창작이 지속되고, 공정하게 이용할 수 있기에 또 다른 창작이 탄생한다.
그래서 저작권은 단지 법적 권리가 아니라 존중이 담긴 약속이라 생각한다. 아이의 가오리 그림처럼, 새끼손톱만 한 창작물에도 세상에 관한 질문과 상상 그리고 사랑이 담겨있다. 이런 고유한 시선을 지켜주는 사회가 되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리고, 쓰고 말할 수 있다. 저작권은 무언가를 선점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가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생겨날 창작자들의 자유를 지키는 울타리이자, 창작자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볼 의지와 용기를 갖게 돕는 작은 약속이다.
스케치북을 넘기며 아이가 묻는다.
"또 뭐 그려볼까?"
나는 잠시 웃으며 생각한다. 뭐든, 너의 시선으로 그려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멋진 작품이야. 그 시작을 지켜주는 것, 그게 바로 저작권이라는 약속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