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7.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가 갑자기 자신의 장래희망이 바뀌었다고 했다. 작년부터 어른이 되면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집을 예쁘게 꾸며주고 싶다면서 말이다. 바뀐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아이돌이 되고 싶단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예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에 동경했나 보다. 자신의 장래희망 이야기를 쫑알쫑알 대던 아이는 그 상상 구름을 나에게 토스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었어?”
나는 꿈이 많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멋진 주인공의 직업이 곧 내 장래희망이 되곤 했다. 정의에 불타는 검사, 마음 따뜻한 의사, 똑 부러진 아나운서... 여러 장래희망들 중에 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으면서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이 있었다. “뮤지컬 감독.” 아이 질문에 가슴 한 편에 묵혀져 있던 꿈 하나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뒤이어진 아이의 물음이 머릿속에 징을 울렸다. 그 꿈을 왜 이루지 못했는지에 대해 답을 할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음악 공부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 먹고살다 보니 그 꿈을 잊었다고 해야 할지, 재능이 없었다고 해야 할지,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을 선택했다고 해야 할지... 잠시 머릿속이 헝클어져 어지러웠다. 결국 장래희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멍청한 대답만 했다.
초등학교 시절 새 학년이 될 때마다 교실 뒤편에는 자기소개 게시판을 꾸몄다. 그 게시판에 항상 들어가는 항목 중에 하나가 장래희망이었다. 그 장래희망을 적는 일이 참 고됐다.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선생님을 적어냈었다. 우선 놀림감이 되기 싫었다. 당시 개그맨, 가수 등을 적어낸 친구들은 종종 반에서 독특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네까짓 게 어떻게 TV에 나올 수 있냐는 비아냥을 받아낼 줄 아는 대범함이 나는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어른들이 좋다고 하는 직업을 선택했다. 음악감독, 가수, 피아니스트 등의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면,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라며 취미생활로 즐기라는 답을 들었다. 반면에 선생님, 검사, 의사 등의 직업을 얘기하면, 훌륭하다며 좋은 꿈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나의 열정과 진정성을 보여주고 꿈을 지지해달라고 설득할 만큼의 열정이 나는 없었다.
4년 동안 언론사 취업을 준비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류 전형과 필기시험은 잘 통과했는데, 매번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붙을 듯 말 듯 계속되는 합격과의 밀당에 지쳐갔다. 당시 사회구조에 많은 원망을 했다. 지방대라서,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서 등등의 떨어진 이유들을 외부에서 찾아대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모지리 같다. 사실 그 답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고,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일을 쫓아갔었다.
요즘 서점가에는 '마흔'을 재정의하는 물결이 한창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생시계를 다시 설정하고 있다. 숏폼 콘텐츠를 보면 예전 마흔과 요즘 마흔의 차이를 선명하고 임팩트 있게 보여준다. 시간이 역행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점점 철이 들지 않는 것인지, 오늘날 마흔은 어린아이 같기만 하다. 현재 40대는 그들의 부모님들이 40대일 때와 많이 다르다.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시기를 뒤로 미루면서 지금의 마흔은 30년 전 20대 후반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 겪고 있는 진로 고민이 어쩌면 당연해 보이면서 위안이 된다. 불혹의 나이에 이제야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도 될 것 같다는 안심을 한다.
10대 20대 때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고민할 새 없이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았던 모습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의대열풍과 대학입시경쟁 불구덩이 속에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일을 하려면 당연한 절차라며 밀어 넣는 가혹한 일을 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아이가 장래희망을 말하면 배고픈 직업이라는 둥 하기 힘든 일이라는 둥의 평가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저 쌍따봉을 세우며 무엇이든 응원과 지지하는 마음을 가득 보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도전했다가 실패해도 회복할 힘을 충전할 든든한 안전지대가 되어주기만 하면 된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가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지켜봐 주는 것만이 부모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꿈을 재단하는 것은 선 넘는 일이다.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을 꾸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그룹의 춤을 따라 하며 저녁식사를 소화시키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꿈을 가득 담고 있는 몸짓에 그저 웃음이 났다. 마음껏 꿈꾸고 무엇이든 해보며 가장 나답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냈으면 좋겠다. 언제든 '네 꿈이 뭐니?'라고 물어보면 눈치 보지 않고 말하는 용기가 있었으면 한다. 내 잣대를 부러뜨려 버려야겠다. 아이의 상상 구름을 따뜻하게 안고 응원해 줘야 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책과강연 #백백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