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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째 영어 과외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종합학원에서 아이에게 과학고 지원을 얘기하고 있는데,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과학고 지원서 쓴다고 새벽 늦게까지 끙끙댈 때가 아니라, 고등학교 가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도록 기초를 탄탄히 해야 할 시점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과연 아이가 과학고 준비를 해도 되는 것인지, 지금 현재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학고 지원서 쓰는 일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최우선이 아니다. 지금 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나 알아가기'이다.
두 달 정도 이 아이와 영어 공부를 함께 하면서, 굉장히 뛰어난 수준을 갖추고 있지 않아서 몇 번 당황했다. 아주 기본적인 문법 개념조차 확실히 알고 있지 않았다. 어휘력도 많이 갖춰져있지 않아서, 지문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태다. 처음 상담했을 때, 성적이 꽤 좋았고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희망해서,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 고2 과정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맞춤형 커리큘럼을 짜고 첫 수업을 하고 난 이후,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만 했다. 기초를 잡아 뼈대를 구성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방법을 훈련하도록 수업내용을 바꾸고 찬찬히 기본적인 개념과 원리들을 설명해 나가고 있다.
영어 지문을 잘 읽어나가고 싶으면 꾸준한 독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매일 독서기록장을 작성하고 책을 다 읽고 나면 토론과 독후감 작성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얼마 전 첫 독후감을 읽으면서 우려했던 부분이 드러났다. 책의 겉내용을 요약정리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말이나 구절을 골라보라고 하거나, 책을 통해 얻은 메시지를 담은 주제문을 작성해 보라는 등의 추가적인 질문들을 했는데, 대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생각 그릇이 아니었다. 독서를 하는 이유와 책 읽기를 통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시험 성적은 꽤 우수했다. 전교 상위권에 있어 선생님들의 기대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을 잘 보는 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살펴야 한다. 영어 성적이 거의 만점에 가깝게 받아왔는데, 아주 기본적인 개념을 알지 못했다. 국어 성적도 좋은데, 책 읽기 수준이 그만큼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수학과 과학 선행까지 하면서 과학고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 두 과목은 정말 잘하는 것일까? 어머니께 중학교 2학년 과정에 나오는 수학 개념을 물어보고, 아이가 설명할 수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아마 수많은 내 경험으로 볼 때,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시험문제를 푼 것이 아닐 것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 정해진 범위에 대해 반복학습을 통해 시험문제를 잘 풀어내는 기계적 학습만 계속해 오면서 깊이 있는 진짜 공부를 해보지 못한 경우이다.
이런 학생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 학원에 가면 현행이니 선행이니 하면서 수업을 몇 시간씩 듣고, 시험 대비 기간에 학교 출제 유형을 완벽히 분석하여 시험에 나올만한 문제들을 반복적으로 풀고 익힌다. 이를테면, '+'를 '=' 반대편으로 넘기면 '-'로 바꿔야 한다고 외우기만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개념을 이해할 여유 없이, 바쁜 학사일정 속에서 문제 잘 푸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학습의 맹점이 고등학교 때 다 탄로 난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차원이 다르다. 개념을 명확히 알고 적용시킬 줄 알아야 문제를 풀 수 있다. 학원에서 내신대비에 기대어 문제 풀기에만 급급했던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좀 더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학습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개념들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열심히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었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좌절하고 만다. 진짜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의 시기는 자신만의 공부 루틴을 만들고 꾸준히 하는 학습 습관을 마련해야 한다.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은 언제인지, 어떤 과목을 좋아하는지, 어떤 과목에서 효율성이 떨어지는지,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는지 등등을 살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나만의 학습법을 만들어야 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다.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서 차곡차곡 자신의 공부 근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과학고 지원서 쓸 게 아니라, 학원에서 5시간씩 잡혀있을 것이 아니라, 아이의 삶의 방향성을 잡아줘야 할 시기라고. 아이에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 것을 조언했다. 수업을 오랜 시간 듣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수업은 임팩트 있게 듣고 자습할 시간을 수업 시간만큼 확보할 수 있는 스케줄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기숙사형 고등학교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공부 루틴을 만드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야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기를 수 있고, 기숙사형이든 아니든 고등학교에 가서 진짜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음을 잘 이해하셨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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