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것

100-04.

by 최고미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을 충분히 감상하는 모습을 늘 꿈꿨다. 로망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곳이었다. 그림에는 문외한이라 갤러리를 돌면서 감상하고 그림에 대해 평을 하는 것이 언감생심,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우연한 기회에 강연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작년 가을, 예술 칼럼니스트 임지영 대표의 강연을 들었다.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과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시되어 있는 모든 그림을 일일이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작품 하나를 집중해서 응시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남기는 '3분 응시 10분 글쓰기' 방법을 들으면서 이상하게 미술관에 발을 들일 용기가 스멀스멀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예술을 즐기는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왜 그렇게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어려웠을까? 나는 또 우리나라의 교육제도 탓으로 돌려본다. 학창 시절 미술시간을 떠올려보자. 작품 창작활동은 어김없이 선생님의 평가를 받아야 했다. 지필 고사를 위해 교과서 내용을 달달 외워 시험 쳤다. 교과서 안에 좋은 그림들을 볼 여유가 없었다. 작가, 화풍, 의미, 기법 등을 외우기 바빴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유럽 미술관을 가지는 못해도 충분히 그림들을 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었다. 미술은 주요 과목이 아니고 그저 내신관리를 위한 시험 대비만 조금 하는 정도였고, 자연스레 미대를 진학하는 친구들만의 특수 과목이라고 여겼다. 국영수를 우선으로 하는 입시제도 안에서 예술을 즐기는 여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림을 즐기고 싶은 로망과 동시에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이라고 선을 그으며 모순적인 마음을 계속 담고 지내왔다. 그러다 임지영 대표의 강연을 들으면서 용기를 내 볼 결심을 한 것이었다. 강연을 듣고 몇 주 지나 서울 출장을 갔다. 미팅 전에 여유 시간이 있어 무엇을 할까 하다가 서울 시립미술관을 검색했다. 천경자 컬렉션 전시를 진행 중이었고, 다른 기획 전시들도 있었다. 무작정 갔다. 운 좋게 도슨트 시간에 맞춰 미술관에 도착해서 설명을 들으며 우리나라 여성화가들의 예술적 감각과 열정을 느꼈다.

그렇게 둘러보다가 여성주의 화가 김인순 컬렉션을 만났다. 처음으로 그림이 내게 말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을 보면서 작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떤 그림은 작가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떤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들을 한참 둘러보고 난 뒤, '어머니, 딸, 여자'에 대한 글 한편을 쓰고 있는 나를 마주했다. '아! 이거구나!' 예술이 영감을 주고, 소통하고,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체험했던 순간이었다.

온전히 그림을 감상하는데 집중했던 미술관 관람 경험을 한 이후, 미술관 문턱이 더 이상 나에게 높지 않았다. 기법, 화풍, 미술 역사 등은 잘 모르지만, 내 취향은 확실히 알아가고 있다. 유독 시선이 가거나 느낌이 오는 그림을 세심히 살피며 그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고 나만의 아카이브에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기록들이 쌓여갈수록 나를 알아가고 있다. 내 취향이 무엇인지 알겠고,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그림이라도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이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뭔가 기품 있는 취미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은 덤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내 안이 가득 채워지는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만족감이 참 좋다. 그림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더 깨달아가는 중이다.

#백백프로젝트 #책과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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