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칸의 땅 심장부에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호수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짐승에게 부족함 없는 물을 제공하였고 생명을 선사했다. 포효하는 세 봉우리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물줄기들이 평지에 모여들며 호수를 형성했고 일대의 모든 짐승들에게 삶의 근원이 되었다. 생명의 원천이 흘러나오는 호수를 타이칸의 동물들은 엄마 호수라 불렀다. 숲의 짐승은 목을 축이러 언제든지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목표를 넉넉하게 달성하고 돌아섰다. 물을 마시다 우연히 먹잇감을 발견하여 배를 채우기도 하였고 스스로 다른 짐승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암수가 다른 동족이 만나 새로운 인연을 형성하고 가족이 되었고 명을 다한 식구들을 떠나보냈다. 삶의 다양한 면모들이 펼쳐지는 호수를 중심으로 동물의 혼과 육체가 잉태되어 자라나고 쇠퇴했다. 여우 가족의 일상 역시 다른 짐승들이 그러하듯 엄마 호수가 제공하는 삶의 고리 안에 자리 잡았다.
땅은 풍요로우니 먹잇감이 주변에 늘비했다. 허기가 올라오면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포만감이 다시 찾아왔다. 여우굴의 보금자리는 좁지만 아늑했고 혼자 생활하는 다른 여우들과 달리 그는 엄마 여우와 함께 생활하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상위 포식자의 두려움은 늘 존재했지만, 이곳에서는 굳이 여우를 사냥하려는 동물은 많지 않았다. 여러모로 여우는 타이칸 왕국의 안정적인 일상이 만족스러웠다. 대자연의 햇살이 주는 따스함은 지척에 있었고 매섭게 내려치는 된서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한 가닥 거미줄이 이어져 거미집을 완성하듯 안정적인 하루하루가 쌓여 평화로운 일상을 형성했다.
그렇게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하루가 반복되던 어느 날 여우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여우는 밤하늘 위에 있었다. 여우의 자그마한 네 발아래 반짝이는 별들이 끝없이 이어져 나갔다. 온통 까맣게 내린 암흑의 세상에 빛나는 별들이 길을 내주었다. 여우는 자신 앞에 펼쳐진 별의 들판을 쉬지 않고 있는 힘껏 내달렸다. 그는 한참을 달리다 눈가에 걸리는 빛을 발견했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빛들이 주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곤 했다. 여우는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둘러보고는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을 닮은 몇 마리 여우들이 함께 힘차게 발을 내딛고 있었다. 달음질할수록 숨이 차 오르는 대신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떨리는 흥분과 끝없는 만족감이 솟아났다. 꿈속에서 여우는 살면서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여우는 크게 기뻤다.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의 모든 빛이 동시에 사라지며 짙은 암흑에 빠졌다. 여우는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음을 알았고 눈을 살며시 떠 보았다. 삶의 빛이 다시금 눈을 통해 그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여우는 자신의 굴 안에서 잠시 웅크리고 앉았다.
‘재미난 꿈을 꾸었구나… 아직도 가슴이 뛰는 걸 보니.’
여우는 꿈을 되새겨 방금 느낀 그 감정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여전히 꿈속에 있는 것처럼 강한 여운이 지속적으로 불어왔다. 몇 번을 되돌려봐도 기분 좋은 꿈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감정은 점차 잦아들다 잠시 후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꿈속의 장면들도 이제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렇게 여우가 희미해지는 감정을 물고 늘어지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슬 한 방울이 앞 발등에 떨어졌다. 그는 그 이슬이 자신의 눈에서 나왔음을 잘 알았다. 처음에 여우는 별 의미 없는 눈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한 방울의 눈물이 두 개가 되고, 곧 세 개가 되었다가 다시금 하나의 줄기로 이어져 줄곧 내리기 시작하고서는 그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나는 지금 왜 울고 있는 거지…? 이 눈물은 왜 멈추지 않지?’
여우는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그가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네 발이 빛나는 별이 아닌 단단한 흙을 밟고 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끝도 없이 달릴 수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숨이 차오르듯 벅차올랐던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우는 슬펐다. 허나 여우의 슬픔도 오래가지 않았다. 마음에 차올랐던 감정도 짧았던 꿈처럼 이내 사라졌다.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사실 정녕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우는 평소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후 여우는 새벽녘이 짙어오면 비슷한 꿈을 꾸었다. 하루는 커다란 물결을 타고 하늘로 끝없이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올라서 보니 자신이 타고 온 물결이 온통 별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별의 물결을 따라 위로 아래로 일렁이며 여우는 다시금 차오르는 행복감을 가득 마음에 품을 수 있었다. 한 번은 하늘의 별이 비가 되어 내려 타이칸 왕국을 가득 채웠다. 꿈속에서 별비를 피해 여우굴에 숨었는데 별의 물살이 굴 안으로 밀려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피신하였다. 별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졌고 엄마 호수의 물이 불어 올라서 불타는 세 봉우리 산 정상까지 차 올랐다. 그날 여우는 꿈속에서나마 세 봉우리 끝에 네 발을 디뎌볼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별빛으로 가득했다. 모든 동물들이 차오르는 물결을 따라 정상에 올라 함께 했다. 호랑이도 여우도 원숭이도 기린도 코뿔소도 하마도 악어도…온 세상이 별에 잠겨 조용했고 어떤 짐승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아 적막함이 감돌았다. 끝없는 고요함 속에 만물의 짐승이 평등했고 여우는 세상 생명 모두가 하나 됨을 느꼈다.
몽환적인 꿈이 계속되면서 여우는 꿈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수많은 감정과 꿈의 잔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생각이 늘어지면서 또 다른 생각과 감정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다 본래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꿈을 꾸는 때마다 여우는 조금씩 달라졌다. 여우의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주변 짐승들은 물론 본인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생각의 변화가 나타났고 곧 행동에 변화가 시작됐다.
여우는 전에 하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토끼를 사냥할 때였다. 허기를 달래고자 온 힘을 다해 토끼를 쫓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달아나는 토끼를 향해 여우는 높이 뛰어오름과 동시에 몸을 순식간에 틀어 먹이를 덮쳤다. 가까스로 토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 수 있었다. 생사의 순간을 입에 무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울렸다.
‘내가 지금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토끼는 그의 한 끼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냥감이 단순한 저녁 식사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생명이라 느껴졌다. 여우는 자신과 동일한 다른 독립적인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그러한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자 이전과 같아 행동하기 어려워졌다. 여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고 있던 입의 근육을 느슨하게 하여 토끼를 놓아주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토끼는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뛰쳐나갔다. 자신을 지키고자 뛰어가는 뒷모습에 더욱 생생하게 토끼의 절실함이 느껴졌다. 먹이의 절실함에 공감하다니. 여우는 끼니를 놓친 걱정보다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는 것에 더욱 당혹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