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끝에 코끼리 만한 빛이 나는 무언가가 서있었다. 그러다 점점 작아지기 시작해 물소 만해 졌다 이내 얼룩말 크기로 줄어들었다. 여우가 두어 번 더 돌 뒤에 몸을 숨겼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을 쯤에 작은 짐승의 크기로 작아져 있었다. 크기가 작아졌다기보다 몸에서 나오던 빛이 시나브로 잦아들며 원래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상대가 생각보다 작은 존재임을 확인한 여우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거리를 줄여보기 시작했다.
온몸을 은빛 털로 뒤덮은 여우 한 마리가 절벽 위에 서서 숲을 내려보고 있었다. 빛나는 보름의 달빛이 온전히 담긴 듯 아름다운 은빛 털이 갈대처럼 밤바람에 흩날렸다. 달님이 구름에 가려지고 나타날 때마다 은빛 털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몸에서 발광하던 빛은 사라졌지만 달빛을 받으면 다시 여전히 빛나는 별의 광채를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 털이 휘날리면 절벽 끝 자리에만 하얀 눈이 나리는 듯 아름다웠다.
은빛 여우는 절벽 끝에 네발로 우뚝 선채 갸름한 눈으로 숲 전체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은빛여우 역시 아까부터 자신의 뒤를 살금살금 다가오는 또 다른 생명체의 인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이 땅에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란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딱히 도움이 되는 존재 역시 부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세계를 계속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려 불타는 세 봉우리 방향을 향했다. 그러다 곧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고 잔뜩 긴장하여 얼어붙은 여우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은빛여우가 말했다.
“붉은 털이 아름다운 동족이여,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가 어디인지 여쭐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붉은여우는 당혹스러웠다. 이미 질문을 받기 전부터 놀라움과 혼란함이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눈앞의 휘날리는 은발에 두 눈은 고정되었고 입은 단단히 얼어붙어 버렸다. 그는 살면서 이렇듯 아름답게 눈 부시는 은빛 털을 보지 못했다. 타이칸 왕국에 살고 있는 여러 마리 여우들을 본 적 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과 같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다른 동물 중에서도 이와 같이 눈부신 털을 가진 짐승을 보지 못했다. 비슷한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붉은여우는 자신도 모르게 은빛여우의 모습에 매료되어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 혹시 마음 불편하다면 답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상대가 반응을 않자 고개를 잠시 갸웃했던 은빛 여우가 얼굴을 제 자리로 바르게 돌리곤 웃으며 말했다. 상대로 하여금 ‘나는 정말 괜찮으니 당신도 마음 편하게 하세요’라는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배려가 배어난 따뜻함 웃음에 은빛 눈발에 얼어붙었던 긴장감도 스르르 녹아들었다. 붉은여우가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여기는 타이칸 왕국이에요.”
대답을 들은 은빛 여우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주변을 두어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아, 타이칸 왕국이군요. 어쩐지 땅의 형세가 익숙하다 싶었습니다. 용맹스럽게 포효하는 세 호랑이 산봉우리! 저걸 보고 알아봤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억력도 흐릿해지는군요. 타이칸의 왕국. 살기 좋은 곳이지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여기만큼 짐승이 살기 좋은 곳은 많지 않습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과 어디서도 해님을 마주하는 드넓은 평야, 물과 해가 모든 생명체에 풍족하죠. 타이칸 역시 좋은 호랑이, 아 실례합니다, 훌륭한 왕입니다. 좋은 세계에서 살고 있군요, 동족이여."
은빛 여우의 말을 들으니 태어나 자란 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레 올라와 붉은여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정한 미소에 이은 칭찬의 말들이 그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했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 누구라 드니 본래의 호기심이 강하게 다시 요동쳤다. 붉은여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이 당신인가요? 누구죠 당신은?”
다급하지만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게 조심스레 말하였다. 사실 그는 은빛 여우의 격식을 갖춘 고유말씨가 신경 쓰였다. 왕을 시중드는 원숭이들이 사용하는 정중한 어법이었다. 다른 짐승이 자신에게 지금처럼 예의를 갖추어 말을 건네는 것이 너무도 어색했다. 그러다 보니 붉은여우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투를 가다듬어 사용하게 되었다. 은빛 여우는 소리 없이 눈과 입으로 두어 번 웃어 보이곤 말했다.
“네, 맞습니다. 당신께는 제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 외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겠군요. 떨어지는 그 무언가를 찾으셨다면 제가 맞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저는 당신과 같은 여우입니다. -당연하게도 말이죠-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우샤이’입니다."
우샤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힐 때 두 다리를 쭉 뻗어 보인 뒤 살며시 누르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땅 위에 살포시 자리 잡으며 홀로 떨어지는 커다란 눈송이같이 공손하면서도 우아하면서 절제된 동작이었다. 방금 소개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여우는 이 은빛의 존재가 자신과 같은 동족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빛나는 은빛 털이며 우아한 몸짓이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면에서 여우인 자신과 이질감이 들었다. 우샤이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에는 놀라움에 양쪽 귀를 모두 크게 찡긋거렸다. 너무 틔나 게 귀를 움직여 결례를 범한 건 아닌지 잠시 걱정하였다.
‘이름을 가진 여우라니...! 그런 짐승은 듣도 보도 못했어. 도대체 이 특별한 여우는 뭐지?’
왕국에서 고유한 이름을 가진 동물은 단 네 마리에 불가했다. 왕국의 주인인 호랑이 타이칸, 지혜롭기로 소문난 원숭이들의 우두머리 샤프먼, 세상 가장 우직한 짐승 코끼리들을 이끄는 헤리티아, 가장 먼 곳을 내다보는 기린들의 수장(獸長) 뷰레딕. 그 밖의 동물들은 모두 종족 이름이 곧 그 동물이 이름이 되었다. 여우는 여우, 악어는 악어, 얼룩말은 얼룩말이었다. 이름을 가진 여우 우샤이는 타이칸 땅에 소속된 동물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