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 7

by 달곰

타이칸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여우는 호랑이를 직접 마주해도 이보다 덜 무서우리라 생각했다. 꿈에서 깨어 하늘길을 찾아가겠다 다짐했을 때만 해도 전에 없던 확신으로 가득 찼던 그다. 단단히 마음먹은 김에 왕국의 지배자의 허락을 구해 디딤돌을 찾아 떠나고자 홀연히 길을 나섰다. 호랑이의 보금자리는 그를 닮은 ‘포효하는 세 봉우리’ 산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왕국의 모든 땅에서 세 봉우리를 볼 수 있었고 동시에 눈에 드러나지 않는 왕의 존재를 감지했다. 봉우리 일대를 자신의 의지로 다가가는 동물은 아무도 없었다. 왕의 보금자리를 방문하는 동물은 오직 두 종류였다. 타이칸을 옆에서 보좌하며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존하는 일부 종족과-주로 원숭이와 썩은 고기로 먹는 날짐승들- 혹은 그의 식사가 될 처지에 놓인 동물만이 왕을 알현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타이칸이 사는 그곳을 ‘울부짖는 언덕’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지나가기를 회피했다. 여우 역시 평생을 무서워하며 근처를 가는 것조차 꺼리던 곳이다. 왕의 승인을 받고 하늘길을 찾아가겠다던, 가득 차 올랐던 확신의 발걸음도 이제는 가벼워졌다.

‘내가 지금 왜 울부짖는 언덕으로 가고 있지…? 떠나고 싶으면 그냥 떠나면 그만 이자나...? 왜 굳이 타이칸의 허락을 구하러 가고 있지…?’

조금씩 비워지는 마음속으로 공포와 의구심이 자리 잡았다. 여우는 아직까지 타이칸을 접견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다. 그로서는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자신의 네 발로 호랑이 소굴로 향하자니 아이러니했다. 길을 갈수록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하고 행동한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기엔 아직 지난밤의 여운이 강하게 맴돌았다. 여우는 자신이 떠날 준비가 됐다고 믿었다. 그리고 타이칸을 만나 제대로 된 작별을 고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 믿었다.

‘타이칸은 이 일대를 다스려온 왕이야. 나는 평생을 그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왔어. 떠나더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자. 그리고 나의 꿈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듣자.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도 올리고… 남겨진 엄마를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말아야지! 혹시 몰라 왕만이 알고 있는 여행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을지…’

울부짖는 언덕으로 나아갈수록 울창했던 숲의 모습이 차츰 걷혔다. 엉성해진 나무 사이로 포효하는 세 봉우리가 보였다. 여우는 네 발을 멈췄다.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 봉우리 방향으로 발을 내디딘 적이 없었다. 아직 타이칸의 왕좌까지는 제법 거리가 남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동물은 암묵적으로 이곳에서 발길을 돌렸다. 여기서부터 침범할 수 없는 타이칸의 보금자리라 여겼다.


일전에 여우는 이 일대를 배회하다 타이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봄날 여우는 햇볕을 즐기며 인근을 산책하고 있었다. 막 허기진 배를 채운 후였다. 든든해진 배와 따사한 날씨 속에 삶의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발걸음조차 자연스럽게 늘어트렸다. 모처럼 여유롭게 코에 한가득 풀 내음을 담아보았다. 막 새롭게 태어나는 대지의 봄날이 여우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더할 것 없는 여유로움에 만족했다.

‘항상 오늘 같다면 야생의 삶도 살만하겠는데.’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자 몸의 방향을 틀려는 찰나였다.

스르르크흐..

갑자기 어디선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였다. 크게 부르짖는 외침은 아니지만 호랑이 특유의 낮은 울림이 땅을 타고 퍼졌다.

…. 르르르…크흐흑크

타이칸이 숨을 쉬듯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호랑이다…! 타이칸이 이 근처에 있어!’

여우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다행히 지척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소리가 아닌 듯했다. 어디서, 왜 호랑이 소리가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그 대상은 아님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여우는 호랑이를 눈앞에 직접 마주하는 마냥 무서웠다. 여우의 붉은 털이 쭈뼛쭈뼛 솟아올랐고 네 발을 디딘 땅이 흔들리듯 몸이 떨려왔다.

‘왜지…?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여우는 이곳을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저히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참 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스스로 안전하다 몇 번을 되뇌며 스스로를 달랬다. 잠시 후 마침내 꼼짝하지 않던 발이 안정을 되찾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우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시 인근에 발을 디디니 자연스레 옛 기억이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날의 떨림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있었다. 그때와 같이 다시금 발이 얼어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여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근처를 서성이며 배회하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 엄마 여우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정말 떠나고 싶은 거니? 지금보다 그게 나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그녀는 이제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아들은 자신이 겪은 꿈 이야기를 했다. 하늘의 별과 함께 세상을 달리는 이야기 등을 하며 설레는 아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엄마 여우는 처음에 아들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며칠 이러다 말 것이라 생각했다.

“꿈속에서 아주 즐거웠겠구나. 이제 먹이를 찾아가보렴.”

엄마는 대충 대답하면서도 항상 공감의 제스처는 잊지 않았다. 아들이 널어놓은 몽환적인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옅어지는 유대감을 잃기 싫었다. 엄마 여우 또한 함께 생활하면서 아들과 관련된 꿈을 여럿 가졌다. 그 꿈에서도 아들은 네 발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다. 어차피 자식은 클수록 어미에게서 멀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 엄마 여우는 그 이야기를 아들에게 하지 않았다. 아니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 아들이 꺼내는 말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이름을 가진 은빛 여우가 하늘을 달렸다니,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타이칸의 왕국을 떠나고자 한다느니 같은 허황된 소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은빛 여우는 모든 동물에게 자신만의 하늘길이 있다고 했어요. 그러고는 제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별처럼 저 별들을 향해 뛰어갔어요! 마치 꿈에서 뛰어나온 제 모습처럼요!”

아들 여우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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