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 9

by 달곰

여우는 여전히 숲과 울부짖는 왕좌의 경계선에서 서성였다. 좀처럼 네 발을 앞으로 향하지 못했다. 그저 타이칸의 보금자리를 중심으로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하염없이 빙 돌며 발을 힘없이 옮겼다. 용기를 내어 두어 발 내딛다가도 다시 원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머리 위를 뜨겁게 비추던 태양이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금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날이 저물겠는데…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구나. 그냥 내일 다시 올까…하지만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굴에는 엄마 여우가 있었다. 아침의 분위기로 보아 당분간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돌아가서 떳떳하게 집에서 하루를 보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자마자 타이칸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아챌 것이다. 아침에 당차게 떠오른 호기로움이 저녁노을의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오는 상상을 하니 이제는 집으로도 발길을 돌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애초에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이대로라면 내일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여우는 용기를 내어 방향을 타이칸이 있는 곳으로 틀었다. 처음에 힘차게 발을 내디뎠지만 갈수록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울부짖는 왕좌가 가까워질수록 여우는 방황했다. 몇 발자국 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한쪽 발이 돌아온 방향으로 틀어 엇나갔다. 그러면 그는 마음을 다잡아 다른 발을 원래 가고자 하는 방향에 다시 놓았다. 여우의 앞발이 몸 앞에서 서로가 가로 지우며 휘저었다. 그는 몸이 향하는 방향으로 똑바로 가지 못하고 갈지자를 그리며 달렸다. 멀리서 누가 본다면 여우가 춤을 추거나 뛰어다니며 땅속의 토끼를 잡고 있다 알았을 것이다. 여우는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다.

‘나는 겁쟁이구나. 이렇듯 유약한 존재였구나. 무슨 배짱으로 큰소리를 내었던가.’

여우는 자기 몸조차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이 원망스러웠다. 타이칸을 만나겠다고 큰소리치던 만용이 부끄러웠다. 이제와 머뭇거리는 네 발을 힘겹게 옮기는 모습이 한심했다. 여우는 무서움은 알았지만 용기를 몰랐다. 용기란 천지를 찢어버릴 듯한 우렛소리 아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이 아니었다. 부들 거리는 네 발을 힘겹게 지탱하면서도 여전히 뿌리내려 버티려는 의지가 용기라는 것을 여우는 몰랐다. 갈지자로 내달리는 우스운 모양새 속에서 여전히 사력을 다해 발끝을 뻗어 나가는 그 모습이 용기라는 것을 몰랐다. 살면서 처음으로 광대한 용기가 그와 함께 하고 있음을 여우는 알지 못했다.


힘들게 발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발아래 무성하던 풀들이 사라지고 작은 모래와 자갈들이 밟히기 시작했다.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를 애써 끌어오다 보니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고 달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멀지 않은 곳에 울부짖는 왕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포효하는 세 봉우리의 암벽이 떨어지는 끝자락에 거대한 암벽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암벽 동굴에는 돌들이 촘촘한 들판처럼 놓여 길을 형성했다. 큰 돌들이 가지런히 놓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보이지 않았다. 동물들이 힘을 다해 바윗돌을 옮겨 왕을 위한 길을 만든 것처럼 보였다.

‘역시 왕이 머무는 곳은 다르다. 웅장하다.’

여우는 평생 자신이 살아온 여우굴이 새삼 초라하게 느껴졌다. 울부짖는 왕좌는 단순한 동굴이 아니었다. 실존하는 타이칸의 묵직한 존재감이 굴 안에서부터 솟아 나왔다. 귀를 가지런히 모으면 타이칸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굴을 오가며 스치는 바람소리인지 진정 타이칸의 숨결인지 모를 스산한 떨림이 울렸다. 이러한 것들이 소용돌이처럼 모여 왕의 보금자리다운 위용을 자랑하였다.
여우는 흥분된 마음을 다시금 가지런히 다독였다. 그때 여우의 눈에 흐릿한 짐승의 형태가 들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굴 아래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바위처럼 보였다. 원숭이였다.


원숭이는 곧게 서서 여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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