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 10

by 달곰

여우는 원숭이를 만나면 언제나 불편한 마음이 앞섰다. 우선 외모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얼굴 앞으로 튀어나온 여우의 주둥이와 달리 그들의 코와 입은 땅을 향하였다. 이마 밑으로 움푹 들어간 눈은 그늘이 서려 자세히 보기 어려웠다. 짐승들의 생각은 눈으로 숨김없이 드러나는데 원숭이는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생각을 읽기 어려웠다. 또한 원숭이는 다른 동물과 달리 말도 두 번 세 번 꼬아서 했다. 그들에게 솔직하게 말을 건네면 돌아오는 대답은 아예 없거나 아주 적었다. 상대방이 마음속에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 대화가 이어질수록 기분은 점점 언짢아졌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질문으로 상대방을 속 터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여우가 이곳엔 무슨 일인가. 약속이라도 있는가. 설마 타이칸과? ”

하찮은 여우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원숭이가 웃으며 말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무표정했으리라 여우는 상상했다.

‘맞아. 원숭이들은 언제나 비꼬듯 말을 하지.’

여우는 원숭이의 언행이 못마땅했지만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타이칸을 보필하기 위해 원숭이 무리에서 보낸 동물임이 분명했다. 원숭이 종족의 우두머리 샤프먼은 해마다 원숭이 한 마리를 선별해 왕의 시중을 들게 했다. 타이칸이 불편함이 없도록 갖은 심부름을 하는 대가로 종족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호랑이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원숭이를 사냥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숭이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일체 관여하는 법이 없었다. 이렇듯 호랑이와 원숭이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살아갔다. 여우가 왕을 만나기 위해선 지금 눈앞에 서있는 원숭이의 허락이 절실했다.

“타이칸의 은총을 받아 산의 중턱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여우입니다. 왕을 뵙고 의견을 나누고자 하여 왔습니다.”

“의견…? 한낱 여우가 타이칸과 나눌 의견이 있는가? 그의 간식거리가 되고 싶다는 의견인가? 한 끼 식사라 하기에 여우는 작다. 너무도. 작은 요깃거리 정도는 가능해 보인다.”

원숭이의 웃음이 비웃음으로 번져갔다. 기분 나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게 들렸다. 여우는 속으로 원숭이는 불쾌한 짐승이지만 하는 말은 재미난 종족이라 생각했다.

“제 이야기는 왕께 직접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능한 일인지 타이칸께 의견을 구해 주십시오.”

여우는 원숭이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타이칸을 찾았다. 원숭이는 여우가 자신을 집권자의 들러리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불편했지만 여우가 예우를 놓치지 않았기에 마땅히 책잡을 것도 없었다. 그 역시 자신의 의견이 중요치 않음은 알고 있었다.

“기다려라. 왕은 잠시 전 오침에 들었다. 미천한 여우를 만날지 묻겠다. 네가 의견을 구할지 타이칸께서 먹이를 구하게 될지 곧 알게 되겠지.”

여우는 계속해서 예의를 유지했고 원숭이는 비아냥거림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원숭이는 여우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굴 안으로 총총히 들어가 버렸다. 울부짖는 왕자 주변으로 타이칸과 원숭이, 여우 외의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굴 안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고요하여 안에 아무도 없다 해도 여우는 믿을 수 있었다. 숨죽이고 있는 것 외에 여우는 달리 취할 행동이 없었다. 여우는 두 앞발을 곧게 하고 뒷발과 꼬리를 땅에 붙인 채 앉아 기다렸다. 동굴 안에서도 밖에서도 지독한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타오르는 노을 같은 누런 털 뭉치를 여우는 보았다. 타이칸이었다. 동굴 안으로부터 해가 떠오르는 광경이 펼쳐졌다. 타이칸의 두 앞발을 따라 거대한 호랑이의 두상이 보였다. 천천히 옮기는 타이칸의 발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웅장한 몸뚱어리가 한참을 드러냈다. 마침내 타이칸이 온몸이 들러냈을 때 여우는 더 이상 울부짖는 왕좌의 입구를 볼 수 없었다. 웅대한 호랑이의 존재감이 동굴 입구 전체를 매웠다. 여우는 타이칸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누런 갈대밭에 검은 불길의 일렁임을 보았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식은땀이 여우는 놀랍지 않았다. 도망치고자 들썩이는 몸과 마음을 겨우 눌렀다. 타이칸의 거대한 코는 두려움에 가득 찬 여우의 땀 냄새를 맡았고 하얗게 늘어선 코털이 무서움에 떠는 진동을 느꼈다.


“네놈은 누군데 감히 나의 낮잠을 방해하는가.”

낮게 깔린 호랑이의 음성이 정적을 갈랐다. 타이칸의 말은 그의 발처럼 발톱을 감춘 듯 매서웠다. 잔잔한 타이칸의 목소리가 여우의 귓가를 후벼왔다. 다행히도 여우의 생각은 몸과 달리 움직임이 가능했다.

‘이것이 타이칸이구나. 너무도 무섭다. 하지만 이제 도망칠 수도 없다.‘

타이칸은 말할 때 잠시 눈을 깔고 여우를 내려 보았다. 이내 고개를 똑바로 하고는 시선을 앞으로 곧게 하였다. 여우에게 호랑이의 시선은 자신 뒤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우는 생각했다. 여우는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왕이시여, 인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산 중턱에서 살아가는 여우 일족입니다. 오늘 왕을 찾아뵙고자 하는 이유는 제 꿈 얘기를 드리고 고견을 여쭙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신비한 꿈을 계속해서 꾸었습니다. 그 꿈은…“

"짧게 하라. “

왕이 여우의 말을 끊었다.

"…. 네? “

"왕께서는 너의 얘기를 길게 듣고 생각하실 시간이 없으시다. 그러니 오래 살고 싶다면 말을 짧게 하라. 길게 말을 잇다가는 목덜미를 물린 채 입을 놀리게 되리라. “

당황하는 여우에게 왕을 대신해 원숭이가 친절히 설명을 보탰다. 여우는 고민했다.

'도대체 얼마나 짧게 해야 하는 걸까…? 계속되는 별에 관한 꿈 이야기, 지난밤 우샤이와의 만남, 그로부터 들은 하늘길과 디딤돌에 관련된 사실,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나의 의지, 무엇 하나 줄일 게 없이 중요한데…‘

드문드문 벌어진 발자국을 따라가기 어렵듯 자신의 이야기가 의미를 헤맬까 여우는 걱정되었다. 여우의 고민이 늘어남과 동시에 다시금 정적이 들어섰다. 원숭이는 침묵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 짧게라도 말을 안 한다면 침묵을 지켜주고자 목덜미가 물릴 것이다. 얼른 고하라 여우여."

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원숭이의 말에 호응했다. 여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빠르게 답했다.

"제가 지속적으로 별을 따라 온 세계를 떠도는 꿈을 꿉니다. 지난밤 우연히 은빛 여우를 만나 하늘에 놓여 있는 길을 따라 세상을 다니는 방법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저만의 하늘길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전에 이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해 왕께 승낙과 의견을 고하고자 이렇게 말씀을 올립니다."

"은빛 여우… 하늘길…크하하하"

타이칸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별 불가능한 소리를 내뱉었다. 옆에서 왕의 동태를 살피던 원숭이도 살며시 비웃음을 더했다. 왕이 울부짖으며 말했다.

“한낱 여우의 꿈 따위를 누가 궁금해한단 말인가!"


포효하는 세 봉우리를 등뒤로 화가 난 호랑이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울렸다. 소중한 낮잠 시간을 시답지 않은 여우의 꿈 이야기로 방해받은 성난 타이칸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호랑이의 외침에 여우의 얼굴이 우샤이와 같이 하얗게 질렸다. 덩달아 원숭이의 안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거 쓸데없이 여우를 왕좌에 들였다고 나까지 혼나는 건 아닐까.’

자신에게도 낮잠을 방해한 책임이 돌아올까 걱정된 원숭이는 짐짓 큰소리로 여우를 빠르게 다그쳤다.

“네 놈이 뭐라고 감히 타이칸의 왕국을 떠나겠다 하는가. 그것도 감히 타이칸 앞에서 당돌하게 주둥이를 놀리다니!”

원숭이의 등뒤로 큰 송곳니를 드러낸 노한 타이칸의 얼굴이 보였다. 정면에 고정되어 있던 호랑이의 눈동자가 여우를 표적으로 움직였다. 여우는 그 섬뜩한 눈을 감히 마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죄를 지은 짐승처럼 눈을 내려 땅을 쳐다보지 않았다. 여우는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겼기에 일말의 떳떳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타이칸이 정면을 응시하듯 여우도 호랑이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도록 눈앞 어딘가 모호한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묵했다. 여우에게 달리 선택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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